▶눈이 쌓이면 간장이 익어가고, 낙엽이 쌓이면 고추장이 익어가던 장독대. 미명의 새벽, 어머니의 치성이 하늘을 감동시키던 그 장독이 사라졌다. 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열기 위해 존재했던 사립짝도 종적을 감췄다. 마당과 고샅에서 왁자지껄하던 놀아 제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끊겼다. 자치기, 비석치기, 딱지치기, 고무줄놀이, 닭싸움, 숨바꼭질, 제기차기, 팽이 돌리기, 연날리기, 수수께끼 놀이, 팔랑개비 들고 뛰고 달리기, 여우놀이, 말뚝 박기, 깨금발 뛰기, 구슬치기는 컴퓨터게임 한방에 녹다운됐다. 마을과 이웃을 소통케 한 징검다리, 외나무다리, 나루와 나룻배도 끊겼고 외줄타기 곡마단도 흑백사진 속에서 겸연쩍게 웃을 뿐이다. 우리들 마음에서 고향이 시들어가고 있다.

▶병아리 품처럼 세상을 노랗게 비추던 백열등도 꺼져버렸다. 보릿고개 시절 허기진 배를 달래던 개떡, 술빵, 누룽지는 기름진 곡기에게 자리를 뺏겼다. 엿장수 아저씨의 요란한 가위질도 이젠 없다. 찌그러진 양푼이나 으깨진 양철을 가져다주면 '엿장수 맘대로'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엿의 크기가 달라졌었다. 고즈넉한 소리들도 이젠 '묵음'이다. 빨래터 방망이 소리, 다듬이 소리, 낙숫물 소리, 타작 소리, 할아버지 담뱃대 터는 소리가 사라졌다. 조악한 물건들을 팔다가 때론 술집으로 변신했던 구멍가게, 궁둥이 살랑살랑 흔들던 미스 김의 직장 '다방'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술찌끼'와 쌀과 함께 끓여낸 달짝지근한 재강죽의 맛,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질근질근 씹어 먹었던 칡뿌리의 쌉쌀한 미각도 안녕이다. 곡식을 빻거나 떡을 찌기도 했던 정미소, 젓가락 장단을 맞추며 아저씨들의 뻐근한 일상을 녹여주던 선술집은 이제 문학 속에서나 있다. 예쁜 반지로 변신하던 토끼풀, 손톱을 빨갛게 물들이던 봉숭아도 매니큐어에게 종말을 고했다. 붉은 꽃물이 첫눈 내릴 때까지 남아 있으면 사랑이 이뤄진다고 연인들은 믿었다. 하루에 한 장씩 찢어내던 달력도 사라진지 오래다. 이 낱장달력은 변소에서 화장지로도 요긴하게 썼었다. 부채, 맷돌, 라디오, 자리끼, 필름카메라도 이젠 박제 신세다.

▶새것, 빠른 것, 편리한 것들에 의해 추억이 사라지고 있다. 추억은 인생의 엽록소다. ‘기억’은 장마전선처럼 소멸하지만 ‘추억’은 첫사랑처럼 가슴속에 영원히 남는다. 우리가 첫사랑을 기억하는 건, 첫사랑 여인이 그리워서가 아니다. 그 설렘이 그리운 것이다.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져버린 세상이니 옛것은 버려지고 사위어간다. 세상 좋아졌다고 하지만, 그건 세상 살맛이 좋아졌다는 게 아니라 점점 세상 살맛이 없어진다는 얘기다. 힘들어도 걸어서 올라야 하는 이유가 있다. 걸어서 올라가지 않으면 주변에 핀 '꽃'을 추억할 수가 없다.

나재필 편집부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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