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전화가 사라졌다. 동전 몇 닢을 먹고 사람과 사랑 사이를 이어주던 주파수가 소멸된 것이다. 소녀가 말없이 내밀던 손수건은 물티슈에게 자리를 뺏겼다. 거품면도가 그럴싸했던 동네이발소도 미장원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서민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던 연탄은 석유와 전기, 가스에 밀려 꺼져가고 있다. '성냥' 파는 아가씨는 동화 속에서나 불을 켜고 '깜장 고무신'은 만화 속에서 까까머리의 속을 까맣게 태우고 있다. 전축LP판 바늘이 거칠게 스치면서 지지직 잡음을 내던 소리의 향연도 MP3, CD에게 자리를 내주고 다락방 신세가 됐다. 옹녀와 뽕녀를 훔쳐보던 비디오테이프, 미국 개척시대 리볼버 총잡이의 서부영화는 아바타식 3D에 맞아 포연 속으로 퇴장했다.

▶기타 하나 둘러메고 떠나던 '완행열차'도 세상의 속도에 항복했다. 사이다에 계란을 까먹던 동네청년은 이제 KTX에 올라 잠을 잔다. 풍경을 볼 수 없으니, 풍경에 대한 기억이 소멸되고 있다. 빨간 우체통과 편지는 카카오톡에, 동네목욕탕은 찜질방에게 인사를 고했다. 급전을 빌려 서민의 허기를 변통하던 '전당포'는 주인의 한숨만 저당 잡히고 '양복점' 주인은 길 건너편 기성복 점방만 바라본다. 집집마다 고구마, 뚝배기를 하얗게 익히던 화로는 밭은기침을 내뱉고 있고, 파전과 생선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던 석유곤로는 가스레인지에 의해 퇴물이 됐다. 심지가 그을리면 가위로 조금씩 잘라내 쓰던 부엌의 안방마님이었건만….

▶손가락과 팔 근육이 뻐근하도록 꾹꾹 눌러쓰던 타자기도 어느 샌가 용도 폐기됐다. 당시엔 대학 등록금 두 배에 달하는 가격 때문에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보배였었다. 책방도 사라졌다. 책방이 사라지니 이야깃거리가 사라졌고 글 읽기가 사라졌다. 질펀한 사랑의 X담이 철철 넘치던 물레방아(방앗간)는 또 어디로 갔는가. 뭇사람들은 물레방아 얘기만 나왔다하면 남녀의 '그 짓'과 연결시키며 키득거렸다. 대들보와 서까래, 콩기름을 먹여 윤기가 나던 온돌방, 시원한 대청마루, 한지를 마른 미닫이문, 흙에 짚을 섞어 넣고 그 위에 회칠을 해서 무척 고혹했던 한옥도 아파트에 의해 멍석을 말았다. 이제 마루에 내려앉은 햇볕은 퇴락한 집의 처마아래서 기억의 입자를 더듬으며 배회하고 있을 뿐이다.

▶조금은 불편해도, 조금은 엉성해도 구닥다리를 쓰면서 느끼는 행복이 별미다. 없어졌기에 차마 잊을 수 없는 것, 사라져버렸기에 오히려 더 마음에 사무치는 것이 추억의 소품들이다. 삶과 죽음, 탄생과 소멸 사이에서 우린 '익숙한 것'들과 작별을 고하고 있다. 이는 '추억의 말소'다. 여행은 떠난 곳으로 돌아가며 끝난다. 우린 장구한 시간을 멋지게 살다간 이 모든 것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들이 귀환하지 않더라도….

나재필 편집부장 najepil@cctoday.co.kr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