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던 그 여인에게서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별의 채비를 모두 끝내자 갑자기 무서워졌다. 그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녀를 잊으려하자 점점 더 그리워졌고, 점점 더 절박해졌다. 그녀의 앳된 가슴이 애드벌룬처럼 부풀어 올라 풍금소리를 냈다. 마치 비오는 날, 잠깐 내비친 햇살을 흠뻑 쐰 기분이었다. 이른 아침, 청각의 창을 열고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콜사인 see red~). 살포시 내려앉은 그녀의 목소리는 솜털 같았고, 흰 숨소리는 미네르바의 따뜻한 음계였다. 한 통의 전화를 받았는데 하루 종일 향기로운 멀미가 났다.

▶"네 편지의 첫 장 첫줄을 읽고, 난 편지봉투를 다시 봉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나 혼자 읽기엔 너무 아까울 뿐만 아니라, 바다도 들어야 합당한 내용들이다." 애벌의 찬사는 너무나 유치했다. 하지만 아찔하도록 설렜다. 때론 너무 가벼워 바람한번 불어도 부서져버릴 것 같은 내용이었지만 러브레터는 터질듯 뜨거웠다. 평상시 못다 한 밀어들이 수북이 쌓였고 그것들은 사랑의 증표로 봉인됐다. 밤새도록 손 글씨로 꾹꾹 눌러쓴 꽃편지지에선 꽃향기가 퍼졌다. (짓궂은 애인의 오빠가 편지를 먼저 뜯어보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빨간 우체통 안에 밀어 넣으면 사랑도 빨갛게 익었다. 한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면 며칠간 머리에서 꽃향기가 났다.

▶연애시절, 그녀와 만나기 위해 7시간을 기다린 적이 있었다. 삐삐(무선호출기)라도 있으면 행방을 찾을 수 있었지만, 삐삐 차는 것도 호사였다. 이럴 땐 무작정 약속장소에서 죽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오지 않으면 지쳐서, 미쳐서 발길을 돌렸다. 애벌의 약속이 가져온 불편이었다. 연인들은 헤어지기 전에 약속장소와 시간을 몇 번씩이나 확인하고 주지시키는 과정을 반복했다. 만약 애인의 집에 전화를 했다간 그녀의 오빠와 아버지가 받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파발은 쉽지 않았다.

▶스마트폰 PDA 내비게이션…. '디지털'에 의존하다보니 이제 '의존심'만 커졌다. 간단한 숫자 계산도 하기 싫다. 집·회사·친구 전화번호도 외워지질 않는다. 처음 만났다고 생각한 사람이 사실은 전에 만났던 적이 있다. 가사를 제대로 외운 노래가 한 곡도 없다. 내비게이션을 단 뒤 지도를 보지 않는다. 사용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않고 무조건 애프터서비스부터 신청한다. 이제 청춘남녀들은 하루 종일 머리를 박고 산다. 스마트폰을 보며 카카오톡으로 현재의 생사를 주고받는다. 그러나 '똑똑한 폰'에는 마음이 담기지 않는다. 마음읽기가 되지 않는다. 함량미달의 기호와 한번 읽고 지나가면 잊혀지는 가벼운 '터치'가 있을 뿐이다. 하얀 고독이다. 그녀를 사랑한다면 우표 한 장 붙여 띄워보라. “나를 잊지 마세요, 물망초!”

나재필 편집부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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