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나재필 편집부장

6개월간 두문불출한 적이 있었다. 깊은 산속도, 감옥도 아니었다. 문명이 활개 치는 도회지 셋방에서 글 나부랭이를 쓴답시고 칩거에 들어갔던 것이다. 허구한 날 글을 쓰고 밥을 먹고 뒷간을 다녀오는 순례를 치렀다. 마치 우리에 갇힌 짐승 같았다. 신기한 것은 소화 장애를 일으킬 만도 했는데 오히려 식탐이 늘었다. 그때 불은 12㎏의 체중은 지금도 빠지지 않고 육신에 깊은 하중을 안기고 있다.

완전한 사육을 통해 얻은 것은 소설책 두 권이었다. 지독한 '출산'이었다. 하지만 무명의 작가를 받아줄 출판사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결국 책은 불태워졌다. 분노의 분서갱유였다. 연필을 꺾자 대문 밖의 세상이 다시 궁금해졌고 대문 밖의 텍스트들이 궁금해졌다. 칩거하던 방에서 '출옥'하던 날, 하늘은 '두부'처럼 희고 '눈물'처럼 푸르렀다.

"피로써 써라. 피로써 쓴 글만이 사랑 받는다"던 니체의 생각이 정녕 옳았다. 책을 읽지 않고 글쓰기에 나선 것은 허세였다. 하루 수백권, 월 3000여종의 책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 인세(印稅)만 가지고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오만이었다. 가슴에 황사바람이 불었다. 똥구멍 같은 세상, 겨드랑이 같은 세상을 탓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쓰기 위해 읽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지금 '읽기'를 잃어가고 있다. '보는 것'에만 익숙해지고 있다. 보는 것에만 익숙해지면 '쓰기'를 잃는다. TV와 인터넷, 스마트폰은 '보는 것'이고 책과 신문은 '읽는 것'이다. 이는 '아는 것'과 '알아내는 것'의 차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그냥 아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고, 책과 신문은 새로운 것을 알아내는 것이다. 종이의 질감을 직접 만지고 체득해야 뇌에 저장된다. 우린 명품과 명차와 아파트 평수 확장에 급급한 나머지 지적(知的) 매력 확장에는 실패하고 있다.

책은 텍스트의 결합이다. 텍스트는 보지 않고 읽어야한다. 만져야한다. 세상도 읽고 세상 밖의 얘기도 읽어야한다. 또한 사랑도 읽고 사람도 읽어야한다. 10명 중 3명이 1년 내내 책 한 권 읽지 않는 세상이 온 것은 양식(良識)의 절멸을 뜻한다. 기계로 보는 텍스트는 겉표지만 보는 격이다. 책장을 열고 한 장 한 장 그 속에 쓰인 내용과 통섭하는 것이, 읽기다. 글을 읽는 것은 정신적 채움(積)이요, 글을 쓰는 것은 정신적 비움(空)이다. 쉬운 예로 GPS(내비게이션)는 '길치'들의 길을 열어주었지만 이제는 GPS가 없으면 길을 찾지 못한다. 길치도, 길치가 아닌 사람도 모두 길치가 되는 격이다.

난 '칼의 노래'를 쓴 김훈의 글을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단문(短文)을 좋아한다. 신문기자 출신인 그는 문장의 검객(劍客)이다. 그의 칼은 예리하다.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고 신속하게 베어버리는 검법이다. 김훈의 검지와 중지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깊게 박여 있다. 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연필로 꾹꾹 눌러 쓰기 때문이다. 컴퓨터 대신 원고지를 쓰고, 키보드 대신 연필을 쓰기에 얻은 명예로운 훈장이다. 그 상처들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다.

수천년 동안 인류는 파피루스, 양피지, 종이, 금속활자를 거치면서, 기록하고 전파하면서 지식문명을 키워왔다. 먼저 신문읽기부터 실천해보라. 신문은 우리 일상생활의 희로애락과 뉴스들을 액면 그대로 전달한다. 혹자들은 종이신문이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문은 뉴미디어가 나올 때마다 언제나 홍역을 치르고도 살아남았다. 30년대 라디오, 70년대 TV, 90년대 인터넷이 오랑캐처럼 쳐들어왔어도 종이신문은 건재했다. 이는 활자가 지니는 전통적 신뢰성 때문이다. 사람들은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사실도 신문에서 읽어야 비로소 믿는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세계문학사상 불세출의 명작으로 꼽히는 '파우스트'를 완성한 나이가 90세였다. 평생을 쉼 없이 독서하고 창작활동에 매진한 덕분이다. 공자는 선각자들이 남긴 답을 보기 위해서 7년간 웅크리고 앉아 책만 읽었다. 그제야 보이지 않던 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리더(leader)들은 대부분 리더(reader)들이었다.

본보가 연중 기획한 '책이 미래다' '내 인생의 책'은 쓰기를 위한 읽기의 바로미터다. 누군가 말했다. "만일 책과 외투에 잉크가 쏟아지거든, 먼저 책의 잉크를 닦고 나서 외투의 잉크를 닦으라. 만일 돈과 책을 동시에 떨어뜨리거든 책을 먼저 줍고 돈을 주우라."

이제 book소리를 울릴 때다. 마음의 소리를 찾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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