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 사람이 미래다-인향만리]
김금순 당진 백석리 부녀회장의 소박한 삶
대기업 퇴직한 남편따라 5년전 귀농해 제 2의 삶
매실한과 마을기업 주도…노인들에게 할일 생기고 동네는 활기 웃음꽃 만발

인향만리(人香萬理). 사람의 향기가 만리 밖까지 퍼져 나가는 멋진 세상.
유명 인사라고 모두 향기를 내는 것은 아니다. 진하지만 오래가지 않는 향기도 적지 않다.
오히려 평범한 듯 살아가고 있지만 인간미 넘치며 은은한 향기를 지닌 사람들이 있다.
충청투데이는 이웃들의 숨은 감동을 찾아 세상을 향기롭게 만드는 ‘인향만리’를 특별기획해 매주 금요일 우리 이웃의 사람냄새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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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에 내려올 때만 해도 노후를 조용히 보내려고 했지요. 처음 매실 한과 공장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 크게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설 명절을 앞두고 충남 당진시 순성면 백석올미마을기업 공장에는 웃음꽃이 그치질 않는다.

공장에서 매실 한과를 만드는 마을 노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을 일구기 위해 일을 한다. 이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것은 김금순(63) 백석리 부녀회장 덕분이다.

백발에 순박한 미소. 쉴새 없이 밀려드는 주문 전화를 받는 모습을 보면, 그녀가 몇 년 전까지 잘 나가던 서울 강남의 사모님(?)이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그녀가 국내 굴지의 전자회사 임원을 마치고 퇴직한 남편과 당진으로 내려온 건 5년 전이다.

처음 그녀의 시골 생활은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골에 내려와도 사는 곳은 아파트여야 한다는 그녀의 고집 때문이었다. 당진 시내에 살며 낮에는 남편 따라 백석리로 가 나무를 돌보고, 저녁에는 아파트로 돌아오는 출퇴근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아파트에 산다 해도 서울 토박이의 농촌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시골의 밤이 무서웠고, 밭을 기어 다니는 지렁이를 보면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시골의 밤에 익숙해지면서 그녀는 어둠 대신 빛을 발견했다. 도시의 가로등 대신 선명하고 아름다운 별빛이 시골 밤을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초리만한 묘목이 저절로 커다란 나무가 되고, 가지에 과실이 맺히는 것도 신비로웠다.

점점 농사에 재미가 붙을 무렵, 때마침 아파트 주인이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그녀는 옳다구나 백석리 산 밑에 터를 구해 3개월 만에 뚝딱 집을 짓고 이사했다.

본격적인 시골 생활은 그녀에게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 이웃에서 아침 식사를 같이 하자며 초대했다. 도시에선 남의 집에서 아침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마을 사람들이 일손이 부족한 이웃을 위해 대가도 없이 품앗이를 해주는 것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시골 생활에 익숙해지던 어느 날 백석리 아낙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부녀회장을 뽑는 자리였다. 나름 노후를 보내려고 시골로 내려온 그녀가 이곳에서는 이팔청춘 젊은이였다. 친구 사귀러 나간 부녀회에서 그녀는 등 떠밀리듯 부녀회장직을 맡게 됐다.

부녀회장이 되니 시골 마을의 현실, 백석리의 현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손바닥만한 텃밭이나 일구며 하루를 노인회관에서 소일하는 할머니들이 마음에 걸렸고, 아무데고 널려 있는 쓰레기도 신경이 쓰였다.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문득 그녀는 마을사람들이 명절 때 집에서 만들어 먹던 한과가 떠올랐다.

마침 당진시에서 열리는 지역축제가 있어 몇몇 할머니들과 한과를 만들어 갔는데 신통하게도 잘 팔렸다. 그래서 얼마 후 열린 순성 매실축제에도 한과를 가져가봤더니 기대이상의 호응이 돌아왔다. 그래서 그녀는 사람들을 모아 본격적으로 한과를 만들어 팔기로 했다. 흔하디 흔한 한과가 아니라 백석리에 풍부한 매실로 조청을 만들고, 마을 주민들이 재배한 곡물과 당진에서 나는 해나루쌀을 이용해 새롭게 만든 지역 특산물인 셈이다. 매년 많은 양이 생산되지만 판로가 마땅치 않아 골치였던 백석리 매실의 환골탈태였다.

그러나 더 큰 목적은 마을 노인들에게 일거리를 주고, 함께 살아가는 행복을 만들기 위해서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마을 주민 38명이 각각 200만원 씩 흔쾌히 내놨다. 공장이 들어설 마을 빈 터를 찾았지만, 돈은 턱 없이 부족했다. 정부가 진행하는 농촌 마을기업을 신청해 복잡하고 지리한 행정절차를 거쳐 지난해 4월 마침내 승인을 받았다. 주민들의 행복을 위한 백석리 사회적자본의 출발이자 로컬푸드의 실현이었다. 주민들이 직접 키운 농산물로 한과를 만드니 농산물 소비가 저절로 이뤄졌고, 하릴 없이 노년을 보내던 노인들에겐 일자리가 생기니 마을엔 활기가 돌았다.

최소 자본으로 시작하다보니 금전적인 수익은 아직도 미약하지만, 임금을 많이 못 받는다고 불평하는 주민은 한명도 없다.

“나는 이 나이에 일할 수 있는 것만도 행복해. 부녀회장님이 오기 전까진 하는 건 노인정에 앉아 TV보는 일뿐이었어. 죽기 전까지 이렇게 즐겁게 계속 일할 수 있으면 더는 바라는 게 없어!"

사랑방 같은 공장에서 도란도란 모여 앉아 한과를 만들던 할머니들은 하나 같이 지금 이대로 행복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김금순 씨의 가장 큰 보람이다. 부녀회가 서로 협동해 즐겁게 일할 수만 있다면 큰 돈을 벌지 못해도 상관이 없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마을 사람들의 일자리를 만들고 행복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수익이다. 그녀의 꿈은 농촌의 아들 딸들이 다시 내려와 터를 잡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살기에도 불편함 없는 시골을 만들고 싶어요. 그러려면 시골 환경과 도시 생활의 편리함을 조화시키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서울 사는 손자손녀들이 내려와 함께 살 수 있을 만큼 생생한 희망으로 가득찬 마을. 백발의 부녀회장 김금순 씨의 꿈은 오늘도 푸르다.

최예린 기자 floye@cctoday.co.kr

▶人香萬里(인향만리) 글씨 제자(題字)=박일규 대전둔산초교장·국전서예초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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