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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잠에서 깬 백제… 1500년전 왕국을 가다

[금토일] 충남 공주시 무령왕릉
1500년 잠자던 처녀분 발굴 큰 역사적 가치
모형관 ‘무령왕릉’은 실제 고분 그대로 재현
왕과 왕비 나란히 누워 1500년을 함께 지내

이재형 기자 1800916@cctoday.co.kr 2012년 12월 14일 금요일 제12면     승인시간 : 2012년 12월 13일 19시 57분

   
▲ 석양이 비치는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 이곳의 백미는 1500년 전 백제의 신비를 간직한 무령왕릉이다. 백제 고분 중 유일하게 처녀분으로 발굴된 무령왕릉는 ‘잃어버린 역사’ 백제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1971년 7월 우리나라 발굴 역사상 가장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 유적이 발굴됐다. 충남 공주시 송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이다.

당시 장마를 맞아 송산리 5호분과 6호분의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고분 일부가 발견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의 고고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벽돌과 석회로 빈틈없이 밀봉된 상태와 주변 고분들의 역사를 볼때 적어도 1500년은 된 처녀분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1500년동안 묶였던 봉인을 단 하룻만에 풀어버린 졸속 발굴에도 불구하고 무령왕릉은 ‘잃어버린 왕국’ 백제의 소중한 가치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1500년 전 타임머신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중학생 시절 국토순례단 일정 중 잠시 들렸던 적이 있다. 당시 역사 교과서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전축분(벽돌을 쌓아 만든 무덤)’ 형태라는 것과, 지석이 출토돼 우리나라 고분 중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이 누군가를 알수 있다는 것 등 단편적인 지식만 가졌음에도 그 의미가 남다르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 때의 기억을 살려 이곳을 취재하기 위해 올해에만 두 번이나 찾아갔지만, 한 번은 내부 공사로 입구 안내관에서 홍보 동영상만 봐야 했고, 또 한 번은 시간 제약으로 결국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다시 시간을 내어 찾은 송산리 고분 유적, 이날도 주차장 입구에 큰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다행히 우회로를 통해 입장이 가능했다.

공원 같은 길을 따라 들어가니 소나무에 둘러쌓인 거대한 고분들이 마침 얼마 전 내린 눈에 덮여 작은 동산과 같다.

당연히 실제 고분의 입구는 역사 보존을 위해 막혀 있고, 대신 모형관을 통해 재현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모형관에는 무령왕릉을 비롯한 송산리 고분군의 내부를 그대로 꾸며놔 관람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허리를 숙여 들어간 무령왕릉의 내부는 작고 화려한 벽돌들이 질서 정연하게 쌓여 아치를 이뤄 아늑함마저 느껴진다.

실제 무령왕릉 안에는 벽면마다 등잔불이 놓여져 있었다고 한다.

벽돌 하나하나의 연꽃 등 문양이 새겨져 있고, 특히 아치를 이루는 벽돌은 양 끝의 길이가 달라 사전에 설계된 아치모향에 꼭 드러맞게 만들었다고 하니 당시 과학적인 건축 기술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무령왕릉 내부 구조 모형을 지나면 발굴 당시를 재현한 실물 모형이 나온다.

그 곳은 1500년의 세월 속에 무령왕과 왕비의 시신은 자연으로 돌아가고, 대신 머리 부분에는 금관 장식과 화려한 귀걸이 등 장신구가, 허리 부분에는 요대와 환두대도가, 하반신 부분에는 다리 받침과 청동신발 등이 놓여져 있어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이 얼마나 깊기에 1500년의 세월 동안 잠을 자듯 저렇게 나란히 누워 함께 피고 지었는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진품 유물을 보다

송산리 고분군 옆에 있는 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을 비롯해 이 곳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 진품을 소장·전시하고 있다.

이날 해외 단체 방문객의 예약으로 바쁜 가운데에도 황운성(72) 국립공주박물관 해설사가 특별히 시간을 할애해주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108종 2907점이나 되며, 이 중 17점이 국보로 지정될 정도로 그 파급력이 막대했다고 한다. 특히 백제 고분이 모조리 일제 강점기에 발굴을 가장한 도굴로 훼손되고 부장품이 사라진 상황에서 무령왕릉 가치는 더욱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이를 반영하듯 박물관의 관람 순서도 무령왕릉 유물 전시실부터 시작된다.

전시실 입구에는 무령왕릉의 흉상이 있다.

무령왕은 사후에 붙여진 시호이며, 생전 이름은 ‘사마’ 또는 ‘융’이라고 한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뿔과 날개가 달린 동물 석상이 유리관 속에 보존돼 있는데, 이를 ‘진묘수’라 한다.

진료수는 고분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로, 중국 등에서는 진묘수가 무덤의 앞에 있는데, 무령왕릉은 특별하게 고분 입구 내부에 있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게 됐다.

진묘수는 출토 당시 뒷쪽 한 다리가 부러진 상태로 발견됐는데, 이는 중국에서도 공통된 현상으로, 아마도 무섭게 보이도록 일부러 부러뜨린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진묘수를 지나면 무령왕릉 출토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유물 형태가 놓여 있다.

고분 입구에 놓여 제사 용구로 추정되는 잔과 수저에 이어 지신에게 땅을 샀다는 징표로 놓인 ‘오수전’ 90개, 진묘수, 그리고 목관 두 개가 순서대로 있다.

그런데 박물관의 오수전 형태가 무령왕릉 전시실에 놓은 것과 달라 발굴 당시 사진을 보니, 전시실 모형이 잘못된 것으로 생각된다. 목관은 재질이 일본산 금송이다.

종주국 백제의 왕이 승하하자 왜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인도 놀라는 화려한 유물의 의미

묘실 모형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진품 부장품을 볼 수 있다.

목관을 만들 때 사용된 못(관정)에는 모두 금칠이 되어 있고, 꽃 장식이 달여 아름답게 보이도록 했다.

이어 현대 가공 기술로도 감탄해 마지 않는 정교한 금제 장신구가 펼쳐진다.

임금의 머리에 쓰는 관(冠)의 순금 장식은 손바닥만한 크기의 불꽃 무늬와 인동초 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작은 장식에 무려 127개의 ‘달개’가 달려있어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길이 35㎝의 거대한 금동신발도 눈에 띈다.

바닥에 스파이크 못이 촘촘히 박힌 금동신발은 당시 권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부장용으로만 사용됐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역사 교과서에서만 보던 화려한 금 귀걸이도 볼 수 있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이는 촘촘한 문양을 볼 때 당시 장인들의 세공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왕비의 발 부근에서 발견된 청동다리미도 관심을 끈다.

일반적으로 부장품은 망자가 평소 즐겨하던 것을 함께 묻어주는 것임을 생각할 때, 왕비가 화려하고 편안한 궁중 생활 속에서도 직접 왕의 옷을 다리던 모습을 상상해본다.

이 밖에 무령왕의 상투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했던 순금 뒷꽂이와 목걸이, 환두대도 등 그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이다.

이 중 특별한 유물이 있는데, 바로 어금니 하나.

1500년의 세월 동안 뼈까지 모두 자연으로 돌아갔지만, 까맣게 변색된 어금니 하나가 남아 이곳에 사람이 있었음을 증명했다. 그런데 처음 이 어금니를 분석했을 때 10~20대의 여성 것으로 밝혀져 학계에 혼란이 있었다.

무령왕이 62세로 승하했고, 왕비와 함께 묻혔다는 기록을 볼 때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는 것이다.

이에 다시 치의학계의 정밀 분석이 진행된 결과 나이의 정도를 알 수 없는 사랑니로 추정된다는 답을 얻어 논란이 일단락 됐다.

 ◆놀라운 유산, 부끄러운 발굴

후새를 이토록 감탄캐 하는 무령왕릉 발굴 과정에는 안타깝고 부끄러운 사실이 숨겨져 있다.

1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분을 단 11시간만에 졸속으로 발굴한 것이다.

당시 비화를 보면 내막을 이렇다. 장마철 수로 작업을 하던 인부의 삽 끝에 고분의 일부가 발견됐고 학계는 흥분에 휩싸여 발굴에 나섰다. 훼손을 우려해 발굴이 비밀리에 추진됐지만, 곧 인근 마을사람들은 물론 서울은 언론사에도 소문이 퍼졌다. 순식간에 무령왕릉 입구는 마을사람들과 취재진들로 둘러쌓였고, 무지한 기자들은 위세를 앞세워 고분 내부를 공개하라며 발굴단을 압박했다.

통제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발굴단은 본격적인 발굴도 시작하기 전에 기자들이 먼저 고분을 들어가도록 허락하는 어이없는 결정을 내렸고, 기자들은 특종경쟁에 내부에서 플래시 사진촬영을 해대며 몇 시간을 휘저었다.

1500년의 세월을 간신히 버티며 바람만 불어도 바스러지는 유물들이 기자들에게 짓밟혔고, 이 때 얼마나 훼손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 같은 사태에 당시 발굴팀은 더 이상의 훼손을 막는다는 이유로 11년을 꼼꼼히 살피고 기록하며 진행돼야 할 무령왕릉을 단 11시간 만에 파헤치는 우를 범했다.

1500년 찬란한 역사가 세상의 빛과 어둠을 동시에 봐야 했던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었다.

현재 무령왕릉 인근 정지산에서 새로운 유적이 발견돼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이 곳은 무령왕의 아들 성왕이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며 임시로 국사를 돌보던 곳으로 추정된다.

정지산 유적은 과거의 치욕적 발굴을 거울삼아 정교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아울러 이를 계기로 송산리 고분군 등 다른 유적에 대해서도 재조사가 추진 중이다.

학교 교육과정에서 역사가 선택과목으로 전락해버린 상황에서 무령왕릉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시사한다.

글·사진=이재형 기자 1800916@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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