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유착’ 망령 떠오르는 건
정치권·기업책무 망각한 탓
투명수사·一罰百戒이뤄져야

# 1995년 11월 3일,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검찰수사가 기업으로 확대되자 전경련을 비롯한 경제단체 회장단과 30대 그룹 총수들은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정치자금 근절을 결의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과거 정치문화가 올바르게 정립되지 못해 음성적 정치자금의 조성과 제공이 관행화해 온 것이 사실"이라며 "떳떳지 못한 정치자금 문제에 기업인들이 직·간접적으로 관련돼 있는 데 대해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며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밝혔다.

# 1996년 2월 15일, 전경련은 기업의 사회적 책무 등 8개항의 실천지침을 담은 기업윤리헌장을 채택·공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1997년 김현철 비자금 사건, 2002년 SK그룹 비자금, 2006년 현대자동차 비자금 사건 등이 수시로 발생했다. 전경련을 비롯해 관련 단체 스스로 기업윤리 헌장을 들먹이고 선거 때마다 불투명한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지만 실제로는 그 정반대이었다. 정치권에서 돈을 달라고 하니 기업인으로서는 별다른 도리가 없지 않느냐는 푸념으로 그게 정당화될 수는 없다.

# '비자금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정경유착'을 연상하는 것은 정·관계가 검은 돈을 받고 특정 기업의 뒤를 봐주는 구조적인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근 대기업 사정바람을 보는 시각이 예사롭지 않다. 한화와 태광그룹에 이어 C&그룹의 비자금 사건의 연결고리에 수사초점이 맞춰져 있다. 권력형 비리 수사를 전담해왔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직접 나선 것도 주목거리다. 대검 중수부가 다시 전면에 등장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사건 이후 1년 4개월 만이다.

수사 대상 기업이 더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10위권 안팎의 대기업이 다음 타깃이 될 것이라는 설도 무성하다. 이들 기업에 대한 수사 시기는 G20 회의 이후가 될 것이라는 등 그럴싸한 소문이 퍼지고 있다. 정·관계 로비 실체가 어디까지 드러날 건지 최대 관심사다.

검찰은 어디까지나 공정한 사회 건설, 사회비리를 척결해서 법의 엄정함을 일깨운다는 검찰 본연의 명분론을 견지할 것이다. 하지만 사건이 전개되면서 나오는 게 정권 차원의 '표적 사정론'이다. 야당 누구를 겨냥하고 있다는 말이 여당 의원들로부터 거침없이 나돈다. 때맞춰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 특별감찰반과 감사원 공직감찰본부장실도 나섰다. 3급 이상 고위 공무원과 지방자치단체장, 공기업 임원 등을 대상으로 고강도 사정을 벌이기 위해서다.

이래저래 사정정국에 본격 돌입한 듯한 분위기다. 우리 사회의 썩어 빠진 거악을 도려내겠다는 데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게다. 문제는 정치적인 이유로 사정의 칼날을 들이대는 데 있다. 집권후반기 레임덕을 막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나온다. 의도가 불순할 경우 그 명분까지 반감되는 사례는 지난날 이미 경험한 바다. 현 정권과 지난 정권의 형평성 논란도 나올 게 뻔하다.

국가공권력이 살아있는 정권에 대해선 납작 엎드려 있다면 국민적인 공감대를 얻기 어렵다. 지금까지 제기된 의혹을 살펴보면 특정기업과 정부 주요 기관 연계설이 나올만하다. 따지고 보면 살아있는 정권도 결국 시간이 흐르면 '죄와 벌'의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놓칠 수 없다.

결국 원죄는 권력이 쥐고 있다. 특정기업과의 악순환 구조가 예나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인식이 불식되지 않고 있다. 이런 해악 앞에서 좌절하는 건 민심이다. 한 점 의혹 없이 규명하는 일이 시급해졌다. 그리하여 공정한 경제시스템을 구축하는 일, 그건 글로벌 스탠더드에 근접하는 길이기도 하다. 투명하지 못한 사회는 후진사회나 다름없다. 예측불가능한 일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미래를 논하는 그 자체가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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