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사회’를 주문하는 민심
정권 차원 ‘통근 화두’로 삼아야

적어도 소시민들은 어디에서라도 번호표를 받고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차분하게 기다릴 줄 안다. 경쟁사회에서 이런 유·무형의 '게임의 룰'이 살아있어야 질서유지는 물론 약자를 보호할 수 있다. '공정한 사회'란 이처럼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니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주는 최소한의 규범이기에 누구에게서나 존중받고 지켜져야 할 가치다.

문제는 '페어플레이(fair play)'를 깡그리 무시하는 특권층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그들은 목표지향적인 가치 또는 효율성만을 앞세워 반칙(反則)과 끼어들기를 일삼는다. 대(代)를 이어 특권을 독점하려는 탐욕 또한 유별나다. 이른바 '개천에서 용이 나던 그 시절'은 갈수록 멀어져 간다. 외교장관 딸 특채 스캔들이 갖는 시대적인 상징성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전직 외교장관 3명이 모두 특채 의혹에 휩싸였다. 자신의 아들을 외무고시에 합격시키기 위해 시험과목을 바꿨다는 대목에선 할 말을 잊게 한다. 아들 외무고시를 위해 현직 외교관들로 과외공부팀을 구성·가동했고, 아들 미국 연수를 위해 외교관 연수 규정을 개정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전 감사원장의 딸 특채를 두고도 의혹이 무성하다. 역사책에나 남아 있어야 할 음서(蔭敍) 제도가 오늘날 '맞춤형 관리' 방식으로 그 맥을 이을 줄이야.

취업난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이 분노에 지쳐 좌절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젊은층에선 빽 줄을 타고 낙하산으로 들어온 고위층 자제를 '똥돼지'라고 부른다. '머리속에 그것만 잔뜩 들어있는 배부른 돼지'라는 뜻으로 들린다. 이 말은 올해의 유행어로 이름을 올릴 기세다. 고위 권력층과 그들 자제의 특채 스캔들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발심과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중앙 각 부처, 산하 단체 및 공기업, 지방정부, 지방공기업은 물론 민간 기업에서도 인사 불공정 사례의 유형은 이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뿌리 깊다. 고발의식 속에 담긴 민심의 힘은 자꾸 번지는 속성을 지닌다. 촛불 사태에서도 경험했듯이 집단 각성이 주는 의미와 파장은 사뭇 강렬하다. 공사(公私)를 구분하지 못하는 고위 공직자의 뒤틀린 망동(妄動)에만 국한될 문제가 아니다. 어디까지 튈지 모르는 메시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가 신속하게 사태수습에 나선 것은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채 논란이 불거진 지 이틀 만에 당사자인 유명환 장관을 물러나게 한 건 퍽 이례적이다. 8·8개각 이후 총리와 2명의 장관 내정자 역시 도덕성 문제로 자진사퇴했었다. 정권 임기 초반 '강부자·고소영 내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였던 그 당시의 뚝심과는 사뭇 다르다. 무엇이 이토록 바뀌게 만들었을까. 지난 7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인문학 서적이 출간되자마자 단숨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배경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정의에 갈증을 느끼는 국민 심성이 그대로 묻어난다. '747정책(연평균 7%성장·국민소득 4만달러·7대강국)'이라는 MB노믹스를 믿고 정권을 교체해줬더니 서민 경제는 갈수록 어렵다. 주변을 둘러봐도 민주주의의 본령과는 상반된 현실이 자꾸 터지니 민심을 답답하게 했을 법하다. 사회 병폐를 법과 윤리 등 정의의 관점에서 재단하려는 시각은 차기 대선에서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생명력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전두환 5공 정권이 '정의사회의 구현'과 '깨끗한 정부'를 내세우며 출범했고, 여당을 민주정의당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정의를 짓밟는 패악(悖惡) 집단으로 역사적인 심판을 받았다. 구호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정권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공정한 사회'라는 화두가 끝까지 좋은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기록되기 위해선 해야 할 일이 작지 않다.

국민의 시각이 한결 엄격하고 매서워졌다. 정치인을 비롯해 고위 관료층부터 앞다투어 솔선수범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오직 국민만을 바라보는 실천우선의 '통큰 정치'가 어느 때보다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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