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빵이 없다고? 고기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 굶긴 왜 굶어"

프랑스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을 한 후 베르사유의 프티 트리아농 궁전 안주인으로 변신한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가 굶주린 군중을 향해 내뱉은 말이다. 철부지 소행이나 다를 바 없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런 말을 했느냐 여부는 아직도 논쟁거리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 난잡한 사생활로 민심 이반의 덫에 걸렸다는 점이다. 결국 그녀는 국고 탕진죄와 오스트리아와 공모, 반혁명을 시도한 죄명으로 1793년 10월 16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2. "나는 왜 단돈 6300원으로 황제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밥 먹으라고 준 돈으로 사회기부도 하고 문화생활까지 즐겼다."

한나라당 차명진 의원이 용산 쪽방촌 최저생계비 체험을 '황제생활'로 비유했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 차 의원은 3710원으로 쌀 한 컵(800원), 쌀국수 한 봉지(970원), 미트볼 한 봉지(970원), 참치캔 1개(970원)을 구입해서 3끼를 해결했다고 한다. 황도 캔(970원)도 사먹었다. 그래도 1620원이 남아서 1000원은 기부하고 600원으로 조간신문까지 사서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최저생계비만 올리는 것으론 답이 안 나올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오는 9월 1일 최저생계비 책정을 앞두고 수급자들의 절박한 처지를 우롱했다는 항의가 잇따르고 있다.

한 일선 학교 교장의 우화가 떠오른다. 그 옛날 초근목피로 연명했던 시절 이야기를 어린 학생들에게 들려주면 "라면이나 햄버거를 사먹으면 될 텐데"라는 반응이 나온다는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인식이 바로 그러하다. 한 국회의원의 쪽방촌 체험 수기에서 드러난 행태 또한 이보다 더 나을 게 없다. 소풍처럼 놀다가는 식이다. 자기위주의 사고방식에 갇히면 타인의 소중한 삶이 담긴 쪽박을 뭉개기 십상이다.

차 의원은 누구인가.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옹호해온 전형적인 수도권 중심 개발론자, 'MB 전도사'로 각인돼 있다. 사회 양극화에 대한 '부자정권' '불통정권'의 편견이라는 오해를 살 소지가 다분하다. 집권 후반기를 맞아 연일 나오고 있는 친서민 구호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는 시각이 나오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닌 성 싶다. 소득·지역·이념·세대 간 갈등 구조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이유를 근원적인 차원에서 되돌아보게 한다.

통계상으로는 적어도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확장 국면에 들어선 것으로 분석되지만 체감 경기는 아직도 얼어붙어 있다. 대기업이 최고의 영업실적을 기록한 반면 중소기업의 사정은 바닥을 헤맨다. 가계부문 역시 상위계층과 하위계층의 양극화 현상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6·2지방 선거 결과 여당이 참패한 것은 바로 이 같은 민심 이반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부가 이를 뒤늦게 받아들인 것만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기업 프렌들리'를 고수하던 집권 초와는 사뭇 다르다. 대기업에 투자, 고용 증대, 공정거래 및 기업윤리를 촉구하는 당·정·청의 발언이 봇물을 이룬다. 대기업 때리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지경이다. 산업, 금융, 부동산, 교육, 고용 등 각 부문에서 중소 상공인과 일반 서민 정책이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생색내기 식 화려한 말잔치에 그치지 않나 걱정하는 목소리도 커진다.

빈곤의 문제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념을 떠나 한 사회의 최대 관심사다. 인간의 삶의 질을 가늠하는 단적인 지표임에 틀림없기에 그만큼 무거운 주제이기도 하다. 이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접근하느냐가 중요하다. 그저 그들이 불쌍해서 한 숟가락 먹을거리를 던져주는 걸로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여길 일이 아니다. 없는 자를 돕는 것, 그건 황제가 누리는 교만이 아니다. 따스한 복지, 지속가능한 손길로 보살피고 배려하는 손길이 아쉽다. 단순히 국면 전환용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다. 두고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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