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덕한 현실 좌절하는 민심

국정 시스템 전반 되돌아봐야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살릴 때

1970년대 만화 영화에 등장한 정의(正義)의 용사(勇士), 예컨대 로봇태권 브이, 마징가 제트를 아는가. 당시 어린이라면 악한 무리를 통쾌하게 제압하는 수호천사들의 활약상을 보며 짜릿함을 느꼈을 것이다. 악당들은 기필코 망하고 말 것이라는 믿음, 이 세상의 선과 악의 구도는 그렇게 결말이 나야 옳다. 그래야 살맛이 난다. 거기에서 도덕, 정의의 개념도 살아 숨쉰다.

정의란 개념은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요즘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 著)라는 정치철학 서적이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인문서적으로는 8년만의 일이다. 저자가 20년 강의 경험을 토대로 구체적 사례를 들면서 독자 눈높이에서 정의의 의미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도록 한 게 주효한 것 같다. 재해지역에서의 바가지요금, 지도층의 납세와 병역 의무 등의 사례를 정의의 관점에서 탐색하는 방식이 손에 잡힌다.

무엇이 우리들로 하여금 '정의'에 주목하게 만들었을까. 역설적으로 얘기하자면 우리 사회가 그만큼 정의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부도덕한 현실에 좌절하는 군상들이 의외로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의 오만과 탐욕, 무지에서 비롯된 우리 사회의 굴절된 인식이 그 중심에 있다. 산업화→민주화의 과정을 거쳐 1987년 헌법의 체제를 이뤄냈지만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다.

먹고사는 데만 매달린 탓에 윤리적 판단이라는 잣대가 흐릿해졌다는 각성이 나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라는 단선적인 인식 때문인가. 우리 사회가 그런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진 건 아닌가 냉엄하게 따져볼 일이다. 그게 '선진화'로 포장된 것이건 그 밖의 화려한 수사로 덧씌워진 것이건 간에 실질적인 민주주의 및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가 퇴색됐다면 그에 따른 반작용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권 출범이래 그런 시각이 줄기차게 제기되고 있음을 본다. 효율성을 앞세워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국정 밀어붙이기 논란이 수그러들 줄을 모른다. 야당이나 국민을 상대로 대화와 타협도 해야 할 터인데 그게 아닌 까닭이다. 계층·지역·세대·이념 갈등 속에 소통 부재 현상마저 고착화되는 양상을 띠고 있으니 여간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다.

시장경제라고 해서 자율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공정한 게임'의 룰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빗나간 승자독식의 구도를 고집한다는 건 자가당착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상생구도가 여전히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중소기업 사정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대기업의 영업이익이 사상최대를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가계부문 소득분배지표에서도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다.

대통령 측근 사조직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을 보는 국민의 허탈감이 심상치 않다. '어설픈 사람들의 과잉충성' '애들 불장난' 쯤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이미 정권 출범 초부터 권력의 사유화 논란을 빚었던 사실을 상기해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간 아무런 자기검열이나 반성도 없다보니 오히려 화를 키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제 각료 개편이 이뤄지면 당·정·청 새판 짜기도 완료된다. 집권 후반기를 맞아 '소통, 친서민, 미래'에 국정중심을 두기로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면면을 보면 낯선 정책목표가 아니다. 지금까지 구호에만 그친 감이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정의개념은 국가의 품위와도 연관된 문제다.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새겨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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