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한국戰 당시 대전형무소장 職代 이모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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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당한 정치범 數 보도보다 훨씬 적어”

[인터뷰]한국戰 당시 대전형무소장 職代 이모옹

『한국전쟁 발발후 7월에 대전형무소는 파옥됐다는 소문이 무성할 정도로 무정부 상태에 가까웠습니다. 특별경비대의 헌신적인 근무가 없었더라면 대전은 서울애국지사 집단 학살에 준하는 대혼란과 비극이 재연됐을 것입니다』 1950년 7월 1일부터 10월 3일 대전수복이후 까지 대전형무소장 직무대리를 맡았던 이모옹(93·대덕구 송촌동)은 9일 대전매일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히고 처형당한 정치범 인원이 과장된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대전 형무소 재소자는 몇명이었나.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지않는다.다만 수감동이 1사-6사까지 여섯개에 여죄수만 수용하는 수감동이 하나있어 모두 7개동이었으니 총재소자는 3천여명 정도였을 것이다.

-산내로 보내진 정치범의 인원은.

?▲정확하지않다.최근 언론에서 1천800명이라고 하는데 절반이하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명적계에 근무하던 이모라는 직원이 알고 있었을 텐데 얼마전 사망했다.

-정치범중 4·3항쟁이나 여순반란사건 관련자는 어느정도 였나.

▲여순 사건 관련자는 군에서 관할하면서 신병만 위탁관리하는 예치수였다. 큰 트럭으로 상당한 인원이 실려왔는데 수용할 감방이 없어서 소내 직조공장에 임시수용했었다.

-여순 관련자들도 모두 산내에서 처형됐나.

▲군에서 수시로 입·출감을 했기 때문에 잘모르겠다.

-여순 관련 수용자들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20-30대로 젊은 사람들이었다. 특이하게 학교 교장 한명이 체포돼 있었다는 말은 들은적이 있다.

-산내 처형에 대한 심경은.

▲직접 군경에 정치범을 인계인수하거나 처형장에 가보지 않았지만 당시 상황상 억울하게 숨진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모든 것을 떠나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다시는 이같은 비극이 없길 바란다. 한편 이날 만난 당시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 분대장 이모씨는 현재 보도가 상당히 부정확하다고 지적하고 적당한 시기에 알고 있는 사실을 밝혀 진실을 알리겠다고 말했다. <宋寅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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