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본사 회장

여론조사에 의한 대통령 후보 결정이라는 세계 최초의 도전에 패배한 정몽준 의원은 가족과 함께 설악산에 들어가 가슴을 식히고 돌아왔다. 비룡폭포 얼음물에 세수도 하고 경포대 바닷가를 거닐기도 했다. 그래도 가슴에 맺히는 게 있어서인지 찾아 온 기자들과 폭탄주 10잔을 마시며 '착잡하다'고 말했다.

정말 그는 착잡할 것이다. 여론조사라는 '마녀'에 홀렸다가 깨어나고 보니 더욱 그럴 것이다.

사실 정확하기로 이름난 미국의 여론조사도 인종차별문제와 가정폭력에 대해서는 신뢰도가 떨어진다.

이를테면 흑인조사자가 백인을 상대로 인종차별에 대한 여론조사를 했다고 하자.

'당신은 인종차별에 찬성합니까?'

그러면 백인 응답자는 흑인 앞에서 속내야 그렇지 않다 해도 '아니오'하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가정폭력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흑인인지 백인인지, 영남 사투리를 쓰는 사람인지 호남 사투리를 쓰는 사람인지, 제대로 설문조사에 대한 교육을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등이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지난 24일 노무현·정몽준 후보의 후보단일화 조사에서 조사기관인 '월드리서치'가 노 후보 38.8%, 정후보 37.0%로 나왔는데 '리서치 앤 리서치'에선 노 후보 46.8% 정 후보 42.2%가 나온 것이 그런 것이다. 즉, 똑같은 설문, 똑같은 시간에 실시한 두 여론기관의 조사결과가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은 두 기관의 조사원 숙련도에 그 원인이 있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전화번호부에서 대상자를 찾아 전화를 걸었을 때 미국의 경우 통화 중이거나 받지 않으면 몇번 더 시도한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비용문제와 시간에 쫓겨 통화가 안되면 그 다음 번호로 넘어가 버린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일주일 정도의 여유를 갖고 샘플을 뽑아 조사를 하는데 우리는 너무 급박하게 한다. 심지어 대통령 후보단일화를 결정하는 것마저 단 하루에 해치워 버렸다.

질문 내용도 중요하다.

가령 어린이에게 "엄마가 좋으냐, 아빠가 좋으냐?" 하는 것과 "아빠가 좋으냐, 엄마가 좋으냐?" 하는 것에 결과가 많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정 후보단일화 여론조사에서는 당초 이회창 후보에 대항할 후보를 묻는 것으로 합의됐었는데 '대항할…'이 '경쟁할…'로 바뀜으로써 사실상 단순지지도 조사와 가까운 느낌을 줘 노 후보가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래서 그를 도왔던 '국민통합21' 자원봉사자들이 여론조사를 무효라며 농성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 의원 역시 그의 자원봉사자들 만큼 억울하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창당자금에 16억원밖에 쓰지 않았고 후원금은 50억원이 들어왔다. 현대중공업의 주식은 그가 출마를 포기하자 껑충 뛰었다. 이렇듯 경제적으로는 오히려 득을 본 셈이다. 그리고 비록 10일간의 꿈으로 끝났지만 대통령 후보의 반열에 그 이름이 올랐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핵심은 절차의 정당성인데 여론조사방식으로 '제비뽑기'하듯 국가운명을 좌우할 대통령 후보를 결정한 것과, 여론조사 만능주의의 병폐를 가져온 것에 대한 비판은 두고두고 계속될 것이다. 그래도 그가 '10일의 꿈'에서 '분권형 대통령제'의 개헌 카드로 노 후보에게 어떤 것을 얼마만큼 얻어낼 지는 모르지만 정치는 축구하는 것과 다르고, 비즈니스와도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면 다행이다.

어쨌든 끝나지 않은 그의 정치 도전에 대한 승패는 더 기다려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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