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 실천학교' 숨은 주역

혹여 배 곯지는 않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행여나 하는 마음에 발길을 재촉하는 학생들이다.바쁜 생계의 그늘에 밀려 부모의 관심에서 소외된 아이들, 말벗 되어 주고 뒤쳐진 공부 한두 줄 봐 주는 것이 고작이지만 여고생들의 토요일 외출은 아이들의 웃음 속에 희망이 된다.

여고생들의 아리따운 마음 뒤에는 어김없이 동방여고 정진희(49) 교사가 있다.동방여고는 경천(敬天), 위국(爲國), 애인(愛人)이란 건학 이념 아래 세워진 유서 깊은 기독교 학교다.

인성교육과 공유하는 삶은 이 학교의 중요한 근간을 이룬다. 발품 파는 이웃사랑 실천이 자연스럽고, 이를 돕는 교사들의 구슬땀이 오히려 평범한 이유다.

"남을 돌본다기보다 같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생활 속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공부에 바쁜 아이들이지만 시간을 쪼개 약속을 지키는 학생들의 모습이 기특하기만 합니다."

지난 95년에 시작된 '사랑의 오누이 운동'과 '학급과 가정간 1대 1 결연', '사랑의 저금통 운동'은 이젠 학교를 대표하는 특색사업으로 자리잡았다. 이 모든 일들이 학생들 손으로 이뤄지고, 학생들 스스로 이어가고 있지만 대부분 정 교사의 손때와 노력을 통해 나온 작품들이다.

시행 초기, 잘해 낼 수 있을까 하는 염려에서 벗어나 독거노인의 손발이 되고, 아이들과 기뻐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본 후 노심초사하던 마음도 눈 녹듯 사라져 이젠 슬그머니 한쪽으로 비켜섰다. 보조자 역할인 교사의 본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전해 주려는 정 교사의 배려다.

정 교사가 사립학교인 동방여고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2년. 1977년 대학 졸업 후 5년간 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던 정 교사는 자신의 기독교 신념을 쫓아 동방여고를 찾았다.

"기독교 학교에서 근무를 하고 싶었습니다. 신문에 경력 교사 공채가 난 것을 보고 무작정 지원했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출발하자는 의지가 강했고, 전 근무지에서의 경험도 학교 적응을 쉽게 했습니다."

3분 프리토킹은 초보 아닌 초보교사였던 정 교사가 고심 끝에 내놓은 역작. 수업 시간 전에 학생이 나와 자유 발언하는 3분 프리토킹은 셋만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여고 시절에 사랑방 역할을 했다.

학생 자신에 대한 얘기부터 밤을 꼬박 새워 가며 지은 시(詩) 낭송까지 분야를 망라한 이 시간은 서로의 벽을 허무는 시간이 됐다.

"지금도 가끔 제자들을 만나면 종종 그때 얘기를 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한두 번 발언을 하면서 학생들도 평소 숨겼던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는 등 의미있는 시간이 됐습니다. 학생 상담은 따로 할 필요가 없었죠."

명확하고 또렷한 정 교사의 말투는 학생들에게 인기를 높이는 요인이었다. 전달력이 좋은 탓에 학생들의 성적도 동반 상승한다. 학생들의 성취도는 학교생활의 재미와 남을 도울 줄 아는 여유로 이어졌다.

제자들과 교정 뒤뜰을 걷는 것도 그의 일과다. 수업 중 왠지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는 제자는 어김없이 그의 호출령이 내려진다. 몇 평 안되는 뒤뜰에서의 만남이지만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주고받는 동안 시간은 무한히 길어진다. 그리고 제자의 미소를 보고 나서야 걱정의 반을 털어낸다. 교사이기 이전에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이다.

정 교사의 고향은 대전이다. 정 교사의 부친은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을 다녀올 만큼 일찌감치 신문물에 밝았다. 집안 교육 또한 엄했고, 정갈할 수밖에 없었다. 정 교사는 그런 부친의 성격을 그대로 닮았다.

대전여중과 대전여고를 거쳐 국문학도(충남대 77학번)로 입문한 후 국어 교사로 자리를 다졌다.

첫 부임지는 신탄진중학교. 넉넉한 도시는 아니었지만 푸근한 교정과 해맑은 아이들의 미소가 서려 있는 곳이었다. 국어 교사에게 더없이 좋았고, 제자들을 두루 살피는 정 교사의 교육관도 펼치기에 좋았다.

"한 번은 읽기를 잘 못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 기가 죽어서인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꺼려하더군요. 몰래 불러서 읽기 훈련을 시켰고, 어느 정도 단계에 오른 것을 확인한 후 수업 중에 읽기를 시켰습니다. 처음에는 드문드문 읽던 학생이 점차 좋아졌고, 마침내 제대로 책을 읽자 같은 반 친구들의 환호성이 터졌죠."

격려와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학생들에게 자리잡았다. 수업 전에 그 학생 몰래 반 친구들에게 조심을 당부한 것은 정 교사의 후일담이다.

정 교사는 요즘 같이 근무하는 교사들 중 모교 교사로 임용된 제자들이 하나 둘씩 늘고 있다. 찰나(刹那)보다 빨리 흐른 듯한 세월에 아쉬움도 있지만 교육자의 길은 계속 주는 것이라는 진리에 마음을 고쳐먹는다.

가끔 구두로 전해 오는 제자들 중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이 그 어느 것보다 좋은 이유도 그런 마음을 대변한다.

정 교사는 수업 중 가끔 아이들의 손바닥을 펴게 한다. 손바닥 한가운데 점을 찍고, 세계 지도를 그리게 한다. 제자들에게 포부와 비전을 갖고, 손바닥 안에 잡힌 세계 지도를 마음껏 돌아다니라는 뜻이다.

지난해 모 라디오 방송 청소년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 학생들을 향한 신앙 에세이를 10개월여 동안 발표한 것과 교사들의 모임인 '작은자 선교회'를 통한 시와 찬양의 밤 행사 역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좋은 문화를 소개하기 위한 정 교사의 마음 씀씀이다.

"인생을 길게 볼 때 초기 30년은 배움의 시기이고, 이후 30년은 사회에 환원하는 시기, 나머지는 봉사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지천명(知天命)을 앞둔 나이에 참된 봉사에 보다 노력하고 싶어요."

더불어 사는 삶, 정 교사의 우직스런 교육관은 제자들을 통해 면면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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