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실장

세계적인 선박왕인 오나시스의 딸 크리스티나는 아버지 재산의 42.5%를 상속받고도 4번째 이혼을 거듭한 끝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한 컨트리 클럽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당시 나이 37세로 사인은 약물 남용이었다. 백만장자의 공주는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세계적인 명사나 재벌 자손들이 자살, 약물 중독 등 극단적인 방법으로 생을 마감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유럽 최대의 금융재벌이었던 영국 로스차일드 은행의 상속자 암셸 로스차일드 역시 자살로 비극을 자초한 케이스다.

명문가 자손들의 경우 조상들의 후광 속에서 겪는 삶의 역정이 순탄치 않음을 말해 준다. 그들에겐 선조의 업적을 능가할 만한 성과를 이루지 못할 경우 쉽게 절망하고 급기야는 최악의 수단을 선택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심리학에선 이를 '파라다이스 증후군'으로 부르고 있다. 선대가 쌓아 놓은 돈과 명예가 결코 후손들에겐 행복만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어제 투신자살함으로써 국내외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현대그룹의 후계자로서 그가 감내해야 할 몫이 그토록 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른바 '왕자의 난' 과정에서 현대그룹 산하 계열사가 분리된데다가 주력기업의 유동성 위기로 제계 10위권 밖의 소그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기까지 형제간에 화해를 끝내 이뤄 내지 못한 것은 현대가(家)의 또 다른 비극임에 틀림없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배경에 대해선 향후 진상규명이 이뤄지겠지만 '대북 송금' 문제와 관련, 특검과 대검의 조사과정에서 쌓인 심적인 고통, 그리고 현대아산의 경영난으로 고심해 왔다는 점도 작용한 듯하다. 소떼 방북으로 남북 화해의 물꼬를 튼 데 이어 이끌어 낸 금강산 관광사업 등 남북협력사업은 어떻게 될 것인가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유망한 경영인이 이를 꽃피우지도 못하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라는 아쉬움을 남겼다. 재계 입장에서 보더라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에 앞서 요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살 풍조를 주목하게 된다. 날마다 신문지면을 채우고 있는 자살이 하나의 신드롬으로 정착돼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작년 자살 사건은 하루 평균 36건으로 집계될 정도다. 이는 10여년 새 2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지난 2002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25개 국가를 대상으로 한 WHO(세계보건기구) 조사에서 한국의 자살률은 헝가리·일본·오스트리아·핀란드 등에 이어 10위로 기록되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한 생명이 살아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아름답고 존엄한 것인지에 대한 가치관이 사라지고 있다는 방증이나 다를 바 없다. 그 이유를 보면 카드빚 등 생활고를 견디기 힘든 빈곤층, 게임을 즐기듯 죽음을 즐기는 대학생, 성적을 비관하는 초등생 등 갖가지다. 개인의 성향 탓도 있지만 세상 살기가 그만큼 어려워진 것이다. 여기에는 사회의 집단의식도 문제다. 한때 서구에서 '건강한 영혼을 위해선 아름다운 죽음을' 표방하는 이른바 '죽음의 미학' 같은 논리는 철저히 배격되어야 한다.

한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붙인 환경이 바로 우리 사회에 온존하고 있다는 사실도 지나쳐서는 안된다. 정치권이 국민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진흙탕을 헤매고 그러다 보니 경제는 불황의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국민소득 2만불 시대를 맞더라도 각 부문별로 사회안전망의 근본적인 시스템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자살을 방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생은 사랑이요, 그 생명은 정신이다"라고 갈파한 괴테의 명언이 가슴에 와 닿는 요즘이다. 심약한 인성을 치유하는 유·무형의 수단을 보다 완벽하게 갖추는 공감대를 형성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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