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꿈나무 키우는 명조련사

"체조 대형으로", "꿈을!". "벌려.", "펼쳐라!"

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운 학생들이 꿈을 펴듯 체조 대형으로 팔을 편다. '구호'도 기상천외, 운동장을 메아리친 학생들의 "꿈을 펼쳐라"란 외침은 희망의 씨앗으로 되돌아온다.

대전체육고 최상인(49) 교사는 체육 꿈나무를 위해 희망을 일구는 학생들에게 자신감과 믿음을 심어 주는 참스승이다.

새벽을 깨우는 아침 훈련과 열정을 담은 최 교사의 지도, 턱밑까지 찬 학생들의 거친 숨결이 '올림픽 금메달'을 향한 것이라면 학생들을 뒷바라지하는 그의 땀은 '인생 금메달'을 향한다.

"학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꿈입니다. 그러나 요즘 학생들은 꿈을 귀찮은 존재쯤으로 치부해 버리죠. 교사는 그런 학생들에게 꿈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를 알려주는 역할이라고 봅니다. 확실해진 목표는 성취를 낳고 성취는 성공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첩경입니다."

최 교사의 제자 중에는 어려움을 겪다가 최 교사의 지도 후 비로소 빛을 보는 제자들이 많다. 운동을 잘한다는 이유로 온 학생들도 있고, 단지 배고픔을 잊기 위해 태극마크를 꿈꾸는 학생들도 있다. 각기 다른 출발 선상이지만 최 교사와 호흡을 같이하는 동안 하나하나 목표가 설정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

최 교사는 학생들에게 최고를 원하지 않는다. 최고가 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요구한다. 최 교사의 지도법에는 기록 단축을 위해 전국 1위와 경쟁을 부추기는 법이 없다. 학생 자신이 기록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할 것을 주문한다. 그 땀방울에 대한 보답은 최 교사가 봉급을 털어 몰래 쥐어 주는 5만원의 장학금으로 표시된다. 체육은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이고, 그 싸움에서 이겨야만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음을, 이미 인생을 통해 겪은 최 교사다.

최 교사의 고향은 공주시 정안, 4남 1녀란 대가족에 부친마저 일찍 돌아가셔서 집안이 궁핍했다. 밥 먹는 날보다 주린 배를 움켜쥐는 때가 많았다. 점심시간이면 어김없이 물 한 잔 들이켜고 운동장을 뛰어다닌 그에게 탁월한 운동감각은 운명이나 다름없었다.

'헝그리 정신.'

초·중·고 시절 내내 반장을 도맡으며, 운동까지 잘하던 그는 1973년 공주사범대 체육교육과에 진학한 후 1980년 태안 서남중에 부임하며 하키부와 인연을 맺는다. 서남중은 앞에 서해안을 끼고, 뒤편에 천수만 바다가 보이는 천혜의 환경을 가진 반면, 하루에 버스 한두 대 겨우 들어오는 오지 중 오지였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주민과 학생들, 서남중에 있는 하키 운동부는 새로운 희망을 일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부임하자마자 하키부 지도교사를 떠맡았지만 막상 하키는 일자 무식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밤새 책을 뒤적거리며 전문용어를 알음알음 알아나갔고, 공주사대 하키부 후배들을 불러 같이 훈련을 했죠."

훈련장은 갯벌이었다. 운동장보다 몇십 배 넓은 모래사장은 그들에게 '꿈의 구장'이었다. 학교 운동장도 울타리 시설이 없어 운동하다 하키공이 인근 고추밭과 논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면 주민들의 반발에 곤욕을 치르곤 했다. "시골 학교에서 하키공 하나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나 다름없던 때입니다. 텃밭에 하키공이 자주 들어가자 공을 볼모 삼아 다른 곳에 가서 운동하라는 주민들도 있었죠. 그럴 때면 소주 한병 사 들고 가 사정사정해서 겨우 공을 받아오곤 했습니다."

열악한 환경은 학생들의 성취 욕구를 높였다. 학생들의 재능은 최 교사의 열정과 맞물려 부임한 첫해 가을, 전국대회 준우승을 일궈냈다.

그런 그의 재능은 1984년 대전여중에 부임, 연식 정구부를 지도하며 또다시 빛을 발휘했다. 대전여중 정구부원은 모두 12명, 그중 생활보호 대상자가 8명이었다. 학교 지원금으론 학생들 허기를 채우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사비를 털어 삼계탕을 사 먹이고 변변한 합숙소 하나 없어 여관방 신세를 지며 훈련을 한 지 1년여, 담력을 키우기 위해 대둔산 구름다리 유격훈련 등을 실시하고, 비오는 날이면 운동복 바람으로 보문산까지 같이 뛰어갔다 오는 강훈련 끝에 전국 소년체년 85∼87년 3연패란 대기록을 일궈냈다.

정구부 명문으로 거듭난 대전여중 학생들에게 1988년 세계대회 출전권이 쥐어졌다. 결승은 당시 세계 최강 일본이었다.

"일본에서 정구는 생활체육으로 붐을 이루고 있어 선수층이 탄탄했습니다. 국내에는 각 시·도에 한 개팀이 고작이었죠, 하지만 학생들의 의지는 대단히 높았습니다. 결국 88, 89년 세계 주니어 대회 연속 우승이란 금자탑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활약하던 선수들이 국가대표로 활동하다 현재는 지도 일선에 뛰고 있는 윤선경 학생과 이미화 학생이다.

최 교사의 체육과의 인연은 이후 용운중(1990년), 오정중(1991년·전국체전 파견근무), 대전여고(1994년·수영부 지도), 충남고(1998년·수영부 지도)를 거쳐, 지난 3월 현 대전체육고에 부임해 핀 수영부 지도로 이어졌다. 10여년 동안 배출한 국가대표만 대전여고 시절 윤혜선, 김희정 학생(수영), 충남고 이상준, 한정명, 이종민, 정재영(수영), 대전체고의 이보람(핀 수영) 등 10여명에 달한다.

지금 현장을 누비는 제자들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새벽 6시 반부터 9시까지 훈련을 하고,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지도를 합니다. 요즘은 학교 내 신언서판(身言書判)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꿈을 가져라', '최선을 다하자', '하면 된다'라는 세 가지 구호로 활력을 북돋우기 위함입니다. 신체활동을 통한 전인교육은 자연스럽게 이어지죠." 교직생활 24년, 최 교사의 인생 금메달이 영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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