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사 글, 임용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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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
禁標(26)

왕이 경연을 아주 없애 버리지는 못하였지만 경연에 나가고 아니 나가는 것은 자신의 자유의사에 있다고 우기려고 중국의 고사까지 상고하여 논리에 맞게 반박을 하니 유순과 박숭질은 굳이 왕을 강박하여 경연에 나오도록 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왕은 경연에 불참한다고 해서 신하들이 시비할 수 없게 만든 것으로 우선 만족하기로 하였다.

왕은 그의 사냥터와 놀이터로 이용할 금표 구역을 확장하는 데 더 마음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정령(政令)은 하루를 거르는 일이 없이 남발되었다.

<옛글에 이르기를 '온 하늘 아래 임금의 땅이 아닌 것이 없고, 온 나라 사람이 임금의 신민이 아닌 것이 없다' 하였으니 만약 내가 다른 나라의 토지를 침범하여 차지한다면 잘못이지마는 내 나라 땅을 내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겠는가? 서쪽은 홍복산(弘福山) 혜음현(惠陰縣)으로부터 공순릉(恭順陵)에 이르기까지, 또 동쪽은 수락산으로부터 녹양평에 이르기까지 모두 금표 안에 넣고 큰길을 내되 아차산 등처(等處)로 나가도록 내라.

이와 같이 하여 장차 수목이 무성해지기를 기다리게 되면 금수가 번식하여 연병(練兵)과 사냥을 할 수 있을 것이니 경기 관찰사가 가서 금표를 세우되 화원(畵員)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지형을 그려 아뢰도록 하라.>

또 다른 정령에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었다.

<주문왕(周文王)의 동산에는 서민들이 자식들처럼 왔다 하였으니 그때는 풍속이 순후하여 그와 같았던 것이다. 지금은 임금이 당연히 할 일을 하더라도 불초한 무리들이 싫어하고 원망하여 범하기 때문에 이미 베어 없앴고, 앞으로도 베어 없앨 것이다.

수렵 같은 것은 음일(淫佚)이 아니요, 정사하는 여가에 기운을 풀고 사방을 살피는 것인데 어찌 백성들의 폐를 두려워해야 되겠는가.>

그리고 금방 또 정령이 내렸다.

<임금이 어찌 밤낮으로 수고만 하고 말 것인가. 정사하는 여가는 때로는 놀며 구경하여 중화(中和)의 기운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종대왕께서는 군신(群臣)을 거느리고 수렵의 예를 행하셨고, 주문왕의 사방 70리에 달하는 광활한 동산도 또한 수렵을 위하여 둔 것이다. 망원정(望遠亭)과 성산포(成山浦), 연희궁(衍喜宮)의 길을 막아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여 수목이 무성하고 금수가 번식하게 하라.>

날마다 이렇게 빗발치듯 정령이 내리니 그에 따라 부작용도 자꾸 생겨났다.

왕이 예상하지 못한 허점(虛點)이 여기저기서 드러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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