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논설실장

바다오리는 자신의 부리로 동료의 깃털을 다듬어 주는 우호적인 행태를 보인다. 원숭이도 상대의 몸에서 해충을 잡아주는 이타심(利他心)을 발휘한다. 이런 행태는 이른바 이기심과 경쟁의 결과 승리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다윈의 '적자생존 이론'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자신이 먼저 단숨에 배신하기보다는 상대와의 협력과 신뢰를 구축한 후 상대의 변절 가능성을 차단하는 '투자의 과정'이 훨씬 유리할 법도 하다.

영국 뉴캐슬대학 길버트 로버츠와 듀람대학 토머스 셰라트 교수는 바다오리의 여러 가지 행동 유형들을 수학적인 방식에 따라 비교·연구한 결과 동료들과의 '내기판 키우기 전략'이 최적안임을 밝혀 낸 바 있다. 그 전제는 동료가 언제라도 적개심을 가질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선 협력하는 게 편리하고, 그 협력의 정도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평소에 보여준 우호적인 수준과 같거나 그보다는 약간 높은 단계의 수준으로 나타난다. 이런 과정이 거듭되다 보면 우호적인 동료감이 더욱 두터워져 집단의식으로 승화된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오는 12월 대선을 앞두고 우리의 정치판에는 경쟁관계가 어떻게 형성돼 있고, 향후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지 눈여겨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민주당 내에서는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탈당하는 의원들이 줄을 잇고 있다.

당을 떠나 새로운 교섭단체를 만든 후 후보단일화를 실현하겠다는 게 그 이유다. 하지만 이미 탈당한 의원들 중에는 한나라당 입당설에 무게를 두고 있어 그 속내를 알 수가 없다. 급기야는 노 후보가 정 후보에게 단일화를 전격 제의하는 '내기판 키우기 전략(?)'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정 후보에게 오늘밤까지 시한을 정해 답변해 줄 것을 요구했기에 정 후보가 이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우세 속에 '1강 2중' 대선구도하에서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전략으로 후보단일화론이 나온 셈이다. 성사 여부는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 과정을 게임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제로섬 게임을 하거나, 서로 공동의 이익을 보는 방향(Two-person Zero-sum game)으로 사안을 풀 수도 있을 것이다. 전략적 개념에서 보면 DJP 공동정권 성사 과정이나, 남북한 화해정책 역시 별로 다를 게 없다. 특히 정치판에서는 상황논리가 지배하기 일쑤다. 한나라당이 노-정 단일화론에 대해 "국민사기극"이라고 맹공을 퍼붓는 이유를 알 만하다.

이미 한나라당은 한국미래연합 박근혜 대표를 비롯해 박태준 전 국무총리 등 제3세력 영입에 주력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민주당 이인제 의원은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 함께 충청, 수도권 영남권 출신 의원 등을 포괄하는 중부권 신당을 창당한다는 전략이다. 그래서 한국 정치의 풍향을 쉽게 예측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하게 된다. 정치란 예측가능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소박한 희망사항이 설 자리가 그만큼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치 자체의 존립 목적이 정권을 획득하는 데 있다지만, 정치 세력이 철새 생리를 닮아가는 과정에서 종전처럼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단계에 우리 사회가 진입해 있다는 점이다.

지난 여름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월드컵의 4강신화를 일궈 낸 배경엔 '붉은 악마'라는 전 국민적인 뜨거운 에너지가 한몫했다는 사실을 정치권은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변화를 향한 몸짓을 정치권에도 요구하고 있다는 메시지다. 게임은 어디까지나 공정한 규칙 아래 진행돼야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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