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개혁' 보다 '평화'를 선택했다. 내가 먼저 사임하면 책임은 나에게 있지만 이사회가 해임하면 책임은 이사회로 돌아간다."

로버트 러플린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이 연임에 실패한 후 자신의 소회를 이렇게 설명했다. KAIST 이사회가 연임거부 결정을 내리자 러플린은 명분론을 견지하면서도 한국 과학계의 문화적인 환경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과학계의 히딩크'로 불리던 그의 이미지는 과연 허상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내막이 있는 것인지 따져 볼 일이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그가 2004년 7월 대내외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KAIST총장으로 취임했을 그 당시와는 판이하게 전개되는 요즘 그 자신도 허탈한 심정을 느꼈을 법하다. 초빙총장의 경우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연임되는 게 일반적인 관례다. 비록 연임 불가로 판정이 났지만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중도하차'라는 성격이 짙다. 러플린 입장에서 보더라도 그 벽을 넘지 못했다는 것은 결코 명예롭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외국 석학이 국립대 총장으로 초빙되는 사례가 어디 흔한 일인가. 2년 전만해도 그에 대한 기대는 그래서 더욱 컸다고 할 수 있다. 급기야는 '러플린 효과'로 포장되면서 한국 과학계의 발전은 KAIST 개혁으로부터 출발할 것이라는 시각이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취임 후 러플린 구상은 좀체 먹혀들지가 않았다. KAIST 사립화를 비롯해 학교운용 및 발전계획을 둘러싸고 사사건건 교수들과 마찰을 빚기 일쑤였다. 구상안마다 교수진과의 지리한 갈등이 더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는 교수 89%가 그의 연임을 반대하는 사태로까지 비화됐다.

러플린 총장의 리더십과 KAIST 운영방식에 따른 KAIST 정체성 위기론까지 대두됐고, 한국 이공계를 폄하하는 러플린의 발언까지 나왔다는 것은 어찌됐건 불행한 일이다. 얼핏 보면 외국인의 문화적인 사고체계라든가 리더십의 발현유형이 우리의 문화적인 환경과 빚는 충돌일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끝내 그의 퇴장을 봐야 하는 대외적인 시각이 곱지만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KAIST 역시 그 부담을 나누어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 교수사회의 고질적인 반개혁 성향은 없었는지 반추해볼 일이다.

때마침 하버드대학에서도 로런스 서머스 총장 사임 배경을 놓고 구구한 억측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서도 학부교육 강화를 골자로 한 개혁안이 교수들의 반발을 촉발, 결국 '천재총장'의 실패를 이끌어냈다. 준비되지 않은 개혁이나 밀어붙이기식 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는 교훈을 확인할 수 있다. 권위나 명예를 중시하는 교수사회일 수록 개혁성과물을 이끌어내려면 신뢰→설득→협상이라는 '소통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히딩크가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데 있지 않다. 풍부한 경험과 비전, 리더십을 갖추고 전국민을 하나로 묶어낸? '소통력'에 있었다.

이젠 제2의 러플린이 나와서는 안된다. 과대 포장된 스타 몇 명만으로는 우리 과학계의 획기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그렇게 하기엔 이미 과학기술의 덩치나 그 역량 수준이 커져 있기 때문이다. '황우석 사태'에서도 드러났듯이 검증되지 않은 특정인의 우상화는 오히려 과학계의 권력화를 심화시키면서 마침내 허상의 나락으로 몰락하게 마련이다. 우선 KAIST의 미래는 외국인 스타만의 몫은 아님이 드러났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한국과학기술계의 비전을 재정립하는 게 시급하다. KAIST 구성원들의 비장한 각오와 더불어 정부의 행·재정적인 뒷받침도 필수적이다. 러플린이 인정했듯이 KAIST는 미국의 MIT대학처럼 세계적인 대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다만 어떻게 접근하느냐가 문제다. 이번 사태를 발판으로 삼아 '연구중심 이공대학'의 리더로 도약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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