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올림픽의 흥분이 채 식지도 않았던 1988년 10월. 교도소 이감 도중 재소자들이 집단 탈출, 서울 도심을 누비며 강도행각을 벌인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이들은 한 가정집에서 인질극을 벌이면서 경찰과 대치하다 최후를 맞았다. 주범 지강헌은 그렇게 갔지만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그의 외침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망령처럼 떠돈다.

지강헌은 당시 전국에 생중계되는 TV 앞에서 사회에 대한 적개심을 감추지 않았다.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사는 게 이 사회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겠다. 돈이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우리 법이 이렇다." 사회에 대한 그토록 사무친 원망이 급기야는 한 인간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 수도 있음을 보여준 실증적인 사례다.

시대는 끊임없이 유행어를 만든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유행어 탄생의 직접적인 배경은 이른바 '5공비리'에 대한 국민적인 공분에서 찾을 수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그의 일가가 재임 중 떡 주무르듯이 국민을 농락했고, 수 천억 원대에 이르는 부정부패를 일삼고도 무사했으니 정의가 살아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바로 그런 인식으로부터 국가권력에 대한 불신을 넘어 국민의 허탈감이 싹트는 것이다.

요즘은 어떤가. "우리 사회에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인식이 있고, 이를 시정해야 한다."라는 천정배 법무부장관의 지난 10일 발언은 오늘의 실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보다 하루 전엔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화이트 칼라 범죄에 대해 엄정하게 판결해야 한다"는 이용훈 대법원장의 비판도 나왔다. 이를 둘러싼 법조계 주변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검찰과 법원 최고 수뇌부의 솔직한 고백이라는 사실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최근 두산 사건은 사법부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그렇지 못해 아쉽다"는 대법원장의 발언은 퍽 이례적이다. 특정사건을 거명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오늘의 사태가 심각하다. 물론 재판에 계류 중인 사건에 대해서 대법원장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사법부의 독립'을 침해할 수 있는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오직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해야 하는 판사들에게 부당한 압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소액일지라도 절도범에겐 실형을 선고하는 반면 수 백 억원을 횡령한 기업인에겐 집행유예로 풀어준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수긍하기 어렵다.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하다'는 사법잣대에 대한 '거미줄 망' 시비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유독 '사법부가 재벌이나 권력 앞에만 서면 작아진다'는 국민적인 불신을 자초한 꼴이다. 천문학적인 규모의 회삿돈을 횡령하거나 분식회계로 국가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재벌총수들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관행이 고착화된다면 사법의 장래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선악에 대한 국민적인 판단기준은 의외로 간단하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소박한 도덕 감정이 거기에 담겨 있다. 그러자면 법은 만인에게 평등한 보편적인 가치를 지녀야 한다. 로마 신화에 등장한 정의의 여신, 그리고 대법정의 여신상이 저울을 들고 있는 것은 정의란 곧? '형평성'에서 나온다는 의미를 깨우쳐 주기 위함이다. 사법의 저울이 기울면 결국 또 다른 사회 양극화와 결부돼 폐해만을 양산해 낼 뿐이다. 법원이 전관예우 금지를 비롯해 양형기준을 운영하는 것도 자의성을 배제하자는 뜻일 게다.

우리 사회엔 양극화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국민이 많다. 그렇다고 그 간극이 좀처럼 좁혀질 것 같지 않다. 그럴수록 경제적 약자, 사회적 소외계층에 대한 사법적인 배려 역시 더욱 절실해진다. 요즘 지강헌을 영화화한 '홀리데이'가 상영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 경찰에게 "팝그룹 비지스의 'Holiday'를 틀어 달라"고 했다. 한 인간의 빈 공간을 채워주는 선율처럼 의지할 수 있는 사법부 기능을 갈망하는 수많은 외침이 아직도 들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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