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부터 지율 스님의 단식이 주는 의미가 무겁게 다가온다.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터널 공사에 반대하며 100여 일 동안의 단식 끝에 탈진 상태로 입원했다는 소식이다. 자신의 목숨과 맞바꿀 요량이 아니었다면 그리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병원에서도 치료 받기를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니 한 여승의 집착으로만 치부하기엔 사태가 예사롭지 않게 비쳐진다.

벌써 다섯 번째다. 단식 기간만도 통산 340일을 넘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율 스님의 행방이 묘연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지만 그나마 그의 근황이 알려진 것은 퍽 다행스런 일이다. 오랫동안 곡기를 끊었다고 하니 이미 육체적으로는 한계상황을 맞은 것 같다. 감히 범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무엇이 그토록 절박했을까?

연약한 한 여승이 온몸을 던져 세상을 일깨우려는 의미를 무조건 폄하할 일은 아니다. 수도자의 숭고한 자세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꺼져가는 촛불처럼 생명의 한 자락에 연연하지 않는 묵언의 메시지란 의외로 간단명료하다. 천성산과 도룡뇽이라는 '자연'과 '생명'과의 관계 설정으로 요약할 수 있지만 그 내면엔 환경에 대한 본질적인 화두가 도도하게 흐른다. '초록의 공명'이란 그의 두 번째 책에 담긴 일관된 가치를 보더라도 그렇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슈바이쳐 박사의 '외경(畏敬)' 사상과도 견줄만하다.

'인디라의 그물'을 연상시킨다. 커다란 그물에 매달린 수많은 보석이 서로 얽혀 아름다운 빛을 주고받듯이 아무리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자연 속에서 서로 연관성을 갖기는 마찬가지라는 '유기체적 세계관'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환경문제도 그렇지만 전통사회윤리의 해체, 인간소외 현상, 그리고 범죄 및 사회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로 연결돼 발생하는 총체적인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류의 악순환 속에서 허덕이면서 사회구성원 끼리 갈등을 양산해내는 현대인이 그 안에 자그마한 실체로 서있을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필경 천성산 습지에 서식하는 동·식물에 그치지 않고 대대로 가꾸면서 살아가야 할 소중한 터전이라는 점이다. 삶의 질 향상과 관련된 개발에 반드시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도 아니다. 국책사업인 천성산 터널이 2002년 착공 이래 환경 논란으로 표류하면서 공사차질로 인한 손실만 해도 2조 5000억원에 이른다. 환경 보존과 환경 개발을 둘러싼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만금 사업이나 방폐장 건설 등의 사업 추진 과정에서도 드러났듯이 우리 사회가 환경보전을 위한 원대한 가치 실현을 위해선 사회적인 합의를 어떻게 슬기롭게 이끌어 내느냐가 관건이다. 지속가능한 국토개발이란 개념도 말처럼 그리 쉬운 게 아닌 탓이다. 극한적인 단식 투쟁만이 최선책은 아니다. 그래선지 지율 스님은 국책사업 발목잡기에 나선 고집불통 승려로 성토되기도 한다. 하지만 단선적인 시각으로는 사태의 실마리를 풀 수 없다.

환경론자나 불교신자뿐 만아니라 각 종교계 등 각계 인사들이 지율 스님 살리기에 나섰다. 그건 또 다른 생명운동이다. 지율 스님이 원기를 회복해서 우리 곁에 되돌아 와야 하는 이유다. 아무리 세상이 가벼워져도 생명을 논할 때는 엄숙해지는 법이다.

지율 스님이 생명의 불꽃을 서서히 태우면서 성찰하는 태도를 보여준 것만으로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 허튼 공명심에 사로잡혀 결국 가식 속에 살다가 몰락의 길을 걷는 사이비 학자들의 모습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실천력 없이 담론에만 열중하면서 자신을 과대포장 하는 풍토에 경종을 울려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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