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서 모친상 듣고 슬픔담아 불러

진방남이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밖을 나와 보니 나라를 빼앗기고 이들에게 당한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슬픔에 마냥 통곡을 하면서 울었다. 진방남은 한바탕 울고 나서 어저께 부른 노래 결과가 궁금했다. 진방남은 그 결과를 알아보려고 전날 노래를 불렀던 극장 쪽으로 가는데 누군가가 진방남을 알아보고 당신이 '박창오' 진방남이 아니냐고 하면서 당신이 조선에서 최고로 노래를 잘 불러서 일등으로 합격이 되어 조신일보 신문에 당신의 사진과 같이 크게 실렸다며 기쁜 표정으로 축하를 하는 게 아닌가. 진방남은 이 소식을 듣는 순간 밤새 경찰서에서 고통받고 괴롭힘을 당하던 것들이 한순간에 풀리며 날아갈 듯한 마음이었다. 이제 가수가 돼 돈을 벌어 어려운 집안을 돕고 명예도 얻어 잘살아 본다는 희망이 그의 마음을 가볍게 해 줬다.

이렇게 해서 진방남은 아니 박창오는 평소 꿈이었던 가수의 꿈을 이루었으며, 지금의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가수이며 작사가로서 가요예술인으로서 평생을 한길로 살아왔다. 진방남은 태평 레코드 회사에 전속 가수로 입사를 하게 됐으며, 그곳에서 작곡가로부터 노래 지도를 받으며 열심히 노래 공부를 하게 된다.

이렇게 노래 공부를 한 진방남은 드디어 레코드 취입을 하게 된다. 당시에는 레코드 취입을 하려면 조선에서는 레코드 취입할 시설은 물론 기구가 없어 부득이 일본에까지 가야만 했다. 이러한 여건이다 보니 가수가 레코드 취입을 하려면 보통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런 악조건임에도 진방남은 레코드 취입을 하게 됨을 행운으로 알고 청운의 꿈을 안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본으로 떠나게 됐다.

이때가 진방남의 나이 22세였다. 진방남은 태평 레코드 회사 문예부장인 고려성씨 인솔하에 가수 백년설, 선우일선, 고운봉, 신카나리아, 나성려, 그밖에 남녀 가수들과 함께 서울역을 출발하여 부산에서 오후 8시에 출발하는 부관 연락선을 타고 다음날 아침에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하도라는 일본 급행 열차를 타고 오사카로 왔다. 이렇게 긴 여행을 했으니 가수들이 얼마나 피로가 쌓이고 지쳤으랴. 그래도 지친 몸을 이끌고 녹음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녹음실에 도착한 진방남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됐다. 바로 고향에서 날아온 모친 별세라는 전보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진방남은 전보를 받고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앞이 캄캄하니 보이질 않았다. 진방남은 훌륭한 가수가 되어 어머님을 편히 모시겠다는 생각을 했건만 꿈도 이루기 전에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시다니…. 진방남은 통곡을 하며 한없이 울었다. 머나먼 일본 땅에서 어머님이 이세상을 떠나셨는데도 갈 수 없는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같이 온 동료 가수들도 진방남의 이런 슬픈 비보에 다들 따라서 통곡을 하며 마냥 울었다. 그러다 보니 녹음실은 울음바다가 되어 녹음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때? 누군가가 일은 당한 일이니 정신을 가다듬고 녹음이나 시작하자는 소리가 있었다. 이 소리에 일행들은 다들 눈물을 닦고 녹음하기로 결정을 하고 준비들을 했다.

진방남은 자기가 노래할 차례가 되어 마이크 앞에 섰다. '불효자는 웁니다'란 전주곡의 음악이 흐르자 진방남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그의 가슴이 찢어지는 통곡의 소리였다. 이 노래를 듣고 있던 동료 가수들도 진방남의 울부짖는 애절한 노랫소리에 다들 따라서 울었다. 어쩌면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이 노래가 진방남의 생을 그린 노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제목부터가 불효자는 웁니다란 노래였기에 더더욱 그렇다. 진방남은 지금도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한 그때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적신다. 그의 나이가 89세의 고령에도 이 점은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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