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원 논설위원

'낙석주의'라는 표지판은 돌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예고해 줌으로써 운전자에게 조심을 주문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런 표지판은 위험요인을 알려 줄 뿐이지, 운전 중에 돌이 떨어지면 어느 누구도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도 없다. 낙석 방지를 위한 조치가 완벽하게 취해졌다면 '낙석주의' 경고가 필요 없다. 이렇듯 위험을 알려 주는 것만으로 위험현상이 근절되는 것은 아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는 인간이 위험의 덫에서 헤어나기가 얼마나 힘든지 보여 주고 있다. 사고 이후 지하철의 위험요인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수동으로 출구를 열 수 있는 장치가 돼 있다는 지적도 위험으로부터의 도피 수단을 강조할 뿐이다. 기관사와 중앙사령탑의 책임있는 행동이 중요한 도피 수단이고, 수동장치는 부차적 수단일 뿐이다. 우리는 땅 속의 교통수단을 개발·이용하면서부터 수반되는 위험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민의 안녕을 책임지는 국가와 정부의 위험인식과 도피수단 강구가 끊임없이 요구되는 것이다.

1986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이 '위험사회'(Risikogesellschaft)란 책을 통해 현대 산업기술문명의 이면을 소개했을 때, 유럽학계는 신선한 충격과 전율을 느껴야 했다. 벡 교수는 지속적 공업화와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끊임없이 사고가 터져 나와 재해의 일상화(日常化), 즉 사고가 삶의 일상처럼 그리고 사회의 정상적인 활동처럼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잦은 사고가 발생하지만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삶의 일부로 여기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의 한 요소가 돼 버린 듯한 재해의 정상성(正常性) 현상이 수반된다. 국가와 기업의 생산성과 효율성 향상 추구는 예외없이 심각한 위험요인들을 수반하고, 기술 자체도 재해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벡 교수의 주장이다.

예를 들면 농산물에 허용되는 농약의 수치, 즉 허용치 기준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계산 가능성을 중시해 특정수치를 허용하지만, 허용되는 수치마저도 국가가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독극물로 보고 있다. 사과에 뿌려지는 농약의 허용치마저도 인체에 전혀 해를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국민의 안녕을 지탱해 주는 사회안전망(safety net)의 허용치도 국가의 자의적 결정일 뿐이다. 대형 참사가 터진 이후에도 허용치를 어긴 자만 벌을 받는다. 안전관리의 허용치를 규정한 사람들의 반성이나 책임 추궁은 없다. 그래서 대구 지하철 사고를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고, 희생된 가족들의 절규만 헛된 메아리로 들려 온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또다시 재해의 일상화와 정상성 현상에 묻혀 지낼 것이다.

'선 성장, 후 안전' '빨리 빨리'와 '적당주의'는 위험사회의 전형적 요인이지만, 각종 범죄 및 폭력, 실업과 생계위협, 정신질환과 마약중독 및 가족붕괴 등이 급격한 사회변동 과정에서 연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등 대형사고 탓에 안전 방향감각마저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다. 책임을 방기하는 정부와 정치권은 물론 대기업마저도 효율과 이윤 추구에 혈안이고, 종교와 교육마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위험에 대한 무지와 오만은 미래의 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고, 미래의 위기는 끊임없이 현재의 위험을 경고해 주고 있다. 이제 우리 모두의 공존과 상생을 위해 위험사회로부터의 도피를 추구해야 한다. 위험사회에서는 권력과 부, 위험의 분배는 양립하지 않으며 오히려 경합한다. 이 때문에 어느 누구도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위험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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