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진호 대전본사 편집부장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공주 공산성을 3년도 더 지난 작년 11월에야 가봤었다. 직접 가본 공산성은 참 좋았다. 무엇보다 성벽 위에 올라서 바라보는 풍광이 일상의 피곤을 잠시나마 잊을 정도로 시원했다. 공산성에 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입구의 비석군이다. 대학에서 사학(史學)을 전공했음에도 바르지 못한 수업 태도로 한자가 짧은 필자는 '그냥 돌이고 안에는 글자구나'하고 지나쳐 버렸다.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공산성 입구 비석군 중에는 '도장관 박중양 불망비(不忘碑)'가 있다. 불망비의 비문은 '유공선정(惟公善政) 민불능망(民不能忘)'이라고 시작한다. 이는 '박중양이 베푼 선정을 백성이 어찌 잊을 수 있을까'란 뜻이다. 뭔가 훌륭한 관리를 기리는 것이구나 하고 지나칠 수도 있지만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그는 '친일파 중의 친일파, 신념에 찬 친일파'다.

박중양(일본 이름 호추시게요·朴忠重陽)는 고종 11년(1874년) 5월에 태어났으며, 1897년 관비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갔다. 그는 도쿄 경시청에서 경찰·감옥제도를 배웠고, 1904년 귀국해 일본군 고등통역관으로 러일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박중양은 평안남도·경상북도 관찰사와 충청남도 장관, 중추원 참의, 황해도·충청북도 지사, 중추원 부의장 등을 지냈으며, 1943년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직접 위문을 다녀오기도 했으며 그 공인지 1945년 4월에는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으로 선임됐다.

일제가 만든 1935년판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식민통치 25년간 최고의 공로자 중 한 사람으로 그를 뽑고 있다. 박중양은 수상 이력도 화려해 서보장(훈6~3등), 한국병합기념장, 조성총독부 시정25주년 기념표창 등을 품에 안았다.

일제는 그를 "도지사 급에서는 비상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박중양을 지칭하는 다른 말은 '이토의 수양아들'이다. 그는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이토公'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를 표현하는 다른 말로 '색마지사(色魔志士)'가 있다. 박중양은 1924년 12월 26일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트 총독 내외를 데리고 보은 법주사를 찾아 대법당에서 '난잡한' 주연을 열고, 비구니 6명을 선발해 시중을 들게 했다. 더 분노할 일은 다음이다. 박중양은 주연 중 당시 스무 살이던 비구니 양순재를 끌고 가 겁탈했고, 이후 양순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올해는 3·1운동,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연초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전국 곳곳에서 기념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기념행사는 행사가 아니라 기념이 중요할 것이다. 역사 속 '그날'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고 하는 그런 기념 말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박중양이 친일파 중 친일파라고 해서 공산성 입구의 불망비를 뽑아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을 없앤다면 상처가 지워질 수 있을지 몰라도 기억도 잊힐 수 있다. 차라리 그 비석 옆에 박중양의 친일 행적을 낱낱이 기록해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왜 잘못된 일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토의 수양아들' 박중양은 1959년 4월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87세. 친일파로 민족의 처단을 받은 게 아니라 천수(天壽)를 누리고 간 것이다. 박중양은 일제 패망 후에도 이렇게 말했다. "독립운동가들이 잘나서 독립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일본을 쳐서 우연히 독립된 것"이라고. 참 나쁜 XX다.

3·1운동 100주년, 혹시 우리가 또 기억해야 하는 것들이 없는지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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