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문면 난지섬, 의병항쟁 중심지
만세운동, 면천보통공립학교서 시작
대호지선 당진 최대규모 600명 참여

▲ 당진시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진은 당진시민들이 독립만세운동재현행사를 하고 있는 모습. 당진시 제공
[충청투데이 인택진 기자]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당진이 주목받고 있다.

당진의 항일운동은 일제강점기 이전으로 거슬러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승전목 전투에서 시작된다. 당진시 면천면 사기소리와 구룡동 일원에 걸쳐 있는 승전목은 이배산과 남쪽의 응산 사이에 S자 모양의 좁은 협곡으로, 당시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능선 사이에 가파른 계곡이 있어 병력이 쉽게 통과하기 어려운 군사적 요충지였다. 1894년 10월 지금의 서산시 운산면에 집결한 내포지역 동학농민군 1만 5000여명은 면천을 공격하기에 앞서 이 승전목에 500여 명을 매복시켜 놓았고, 매복 다음날 면천에서 출발한 일본군 소위 아키마쓰가 이끄는 90여명의 일본군이 이곳을 지날 때 기습공격을 감행해 큰 승리를 거뒀다.

1900년대로 넘어오면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한 석문면 난지섬이 의병항쟁의 중심에 섰다. 1908년 3월 15일 처절한 항일의병전쟁이 일어났던 이곳의 의병활동은 크게 두 번으로 나눠지는데 1906년 당시 면천 출신인 최구현 의병장을 중심으로 면천성을 공격했던 사건과 1907년 정미조약에 의한 군대 강제해산 이후 홍원식 의병장이 활약했던 시기로 구분된다.

1908년 3월 15일 당진지역 의병운동의 근거지를 소난지도로 판단한 홍성경찰분서가 이곳에 기습공격을 감행했고, 이들에 맞서 싸운 홍원식 의병대는 격렬한 전투 끝에 41명이 전사하고 50여명이 행방불명됐다. 소난지섬에는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한 의병총(등록문화재 제629호)이 조성돼 있다.

동학농민운동군과 의병들의 호국정신은 일제강점기에도 이어졌다. 1919년 3월 10일 당진시 면천면에 위치한 면천보통공립학교에서는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충남도내 최초로 학생주도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16세였던 면천보통학교 4학년 원용은 학생이 3·1운동을 목격하고 당진으로 내려와 동급생 박창신과 4학년 급장이었던 이종원과 함께 면천면 동문 밖 저수지부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면천보통학교 교문까지 행진했는데, 이는 광주학생항일운동보다 10년이나 앞선 학생주도의 독립운동이었다.

면천보통학교 3·10만세 운동은 약 한 달 뒤인 4월 4일 대호지면에서 시작해 정미면 천의장터까지 이어진 독립만세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4·4독립만세운동은 대호지면사무소에서 시작해 천의장터에서 격전을 벌인 당진지역 최대 규모의 독립만세운동이다. 1919년 4월 4일 오전 9시를 기해 600여명이 대호지면 광장에 모여 사전 계획대로 30자 높이의 대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하면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이후 이인정 대호지면장의 연설과 남주원의 독립선언문 낭독, 이대하의 애국가 제창에 이어 행동총책 송재만의 선창에 맞춰 선서를 한 후 만세운동이 천의장터까지 이어졌다.

4·4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당진지역 최대 만세운동이라는 점 외에도 당시 대호지면장이었던 이인정과 면사무소 직원 민재봉, 송재만, 그리고 지역유지였던 남주원 등이 독립운동을 주도하며 전국 최초의 민관 합동 항일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당진=인택진 기자 intj4697@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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