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형 을지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오늘도 아이는 목욕하러 가자고 하는 아빠의 말에 시큰둥한 반응이다. 몸의 때를 씻어 낼 때 아프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래서 가기 전부터 항상 아빠랑 옥신각신한다. 나 또한 어린 시절 비슷한 기억이 있어서 최대한 아프지 않게 씻기려고 하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어쨌든 온갖 감언이설로 설득한 후 데리고 가지만 그 순간이 되면 여지없이 저항한다. 목욕 후 초코라테가 기다린다고 미끼를 던져도, 끝나는 순간까지 얼굴 표정이 그리 밝지가 않다. 그래도 씻고 난 뒤의 상쾌함을 맛보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애써 그 표정을 무시한다.

수년간 아이와 함께 목욕을 하다 보니 아이들 씻기기가 갈수록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씻겨야 할 몸의 면적이 넓어져 힘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살이 많은 신체부위를 씻을 때는 살이 잘 접히기 때문에 다른 부위에 비해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한 번은 아이를 씻긴 후 힘이 빠져서 정작 내 몸은 비누칠만 하고 목욕을 끝냈더니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아이는 왜 대충 씻느냐고 나를 나무라듯 말했다. 서운한 마음이 들어 그 이유를 사실대로 말해주려고 하다가 짐짓 나의 약함이 아이에게 드러날까 싶어 순간 "응, 아빠는 나중에 또 올 거야"하고 대충 얼버무렸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자주 다녔기 때문인지, 어느 날은 아이가 수건을 손에 쥐더니 아빠의 등을 밀어주겠다고 했다. 게다가 비누칠한 머리에 물도 뿌려주겠단다. 아빠를 따라 온 것만도 고마운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꼭 해보고 싶다고 해 내버려뒀다. 그리고 어깨너머로 본 것을 흉내 내려는 심산이라 여겼기에 필자는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아이의 어설픈 손놀림이 필자 마음에 잔잔한 감동의 파장을 일으켰다. 아이의 손힘이 제법 무겁게 느껴졌고, 등을 쓸어내리는 실력이 뜻밖이었다. 아프지 않느냐고 건네는 한마디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행동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 같았다. 몸만 성장한 줄 알았는데 마음도 함께 자라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흐뭇했고 나의 눈시울은 이내 붉어졌다.

목욕을 마치면 항상 바로 옆 카페에 들러 함께 초코라테를 마신다. 아빠의 노력을 확인하고픈 마음에 "목욕하고 나니까 어때? 상쾌해?"라고 꼭 물어본다. 예전에는 곧잘 말로 잘 대답했는데 요즘엔 고개만 끄덕인다. 이에 질세라 난 대답을 꼭 듣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묻는다. 억지로라도 대답하는 아이의 뽀얀 얼굴이 귀엽기만 하다.

'아이와 함께하는 이런 순간이 언제까지 이어질까'라는 생각에 잠긴 채 아쉬운 발걸음을 집으로 옮긴다.

아이는 앞으로 또래 친구들과 시간을 점점 더 많이 보내려고 할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아빠는 순위에서 서서히 밀려날 것이 분명하니까. 선배 부모들이 이구동성으로 주고받는 '품 안의 자식'이란 말을 필자가 받아들이기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본인도 모르는 사이 그 글귀가 마음 한 켠에 조금씩 새겨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누구든 그 사실로부터 예외일 수 없다는 명제 앞에서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두 손으로 가슴을 쓰다듬지만 그 서글픔은 위로받지 못한 채 내 주위를 쉬지 않고 맴도는 것 같다. 더욱이 필자의 부모님 또한 그랬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되니 어느덧 눈가에 눈물까지 고인다.

그렇지만 함께하는 지금 이 시간의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다. 밀려드는 상념을 잠시 멀리하고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의 얼굴을 향해 미소 지어 본다. 아이는 내 얼굴을 보고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아빠, 왜 웃어?" 하고 묻는다. 마음이 통했나 보다. 아이도 미소로 답한다. 아이의 손을 잡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이와 함께 하는 다음 목욕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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