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규의 서예이야기]

홍구(鴻溝)는 전국시대 위혜왕(魏惠王, 재위 BC370~BC319)이 도읍을 대량으로 옮긴 후 수리 공정을 위해 팠던, 황하(黃河)와 회하(淮河)를 연결하는 운하로, 지금은 하남성 중모(中牟)에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위나라는 홍구의 물을 이용한 수공을 받고 진(秦)나라에 멸망을 당했다.

홍구는 또한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놓고 쟁패하면서 국경선으로 삼았던 곳이다. 후에 쌍방이 휴전을 했지만 유방은 휴전 협약을 깨고 홍구를 건너 결국은 항우를 멸망시켰다.

한국 장기에는 없지만 중국 장기판에 있는 한(漢)나라와 초(楚)나라의 경계선인 중앙의 강이 바로 홍구이다. 그리고 중국 속담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고 전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건곤일척:乾坤一擲)’을 가리킨 ‘강을 건넌 졸때기(과료하적졸자:過了河的卒子)’란 말이 있는데, 여기의 강도 바로 홍구이다.

전국시대를 통일했던 진시황이 사망한 후, 초나라를 재건하고 진나라 멸망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항우 등 항진(抗秦) 세력에 의해 진나라가 멸망했다. 스스로 초패왕(楚覇王)이 된 항우는 팽성(彭城)을 수도로 삼고, 초회왕을 의제(義帝)로 옹립했다.

그리고 진나라를 타도하는 데 공이 큰 사람들을 제후로 봉했다. 항우는 특히 위험인물인 유방을 한왕(漢王)으로 봉해 오지인 파촉(巴蜀) 땅으로 몰아냈다. 천하는 일단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고, 항우가 천하를 차지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 의제가 항우의 사주를 받은 영포(英布)에게 시해를 당하자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었던 제후들이 각지에서 들고 일어났다.

항우가 각지의 반군들을 평정하는 사이, 유방은 관중 땅을 공략하고, 이어 56만 대군을 몰아 단숨에 팽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급보를 받고 말머리를 돌려 달려온 항우의 3만 기병에게 대패한 유방은 아버지와 아내를 적진에 남겨 둔 채, 겨우 목숨만 부지하여 형양(滎陽)으로 달아나 군사를 정비하고 항우와 대치했다. 그 후 쌍방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고 휴전을 하기로 했다.

항우는 약속을 지켜 유방의 아버지와 부인을 돌려보내고 팽성을 향해 철군 길에 올랐다. 하지만 유방은 장량과 진평의 계책에 따라, 약속을 지키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 항우를 추격했다.

이듬해 유방은 한신과 팽월 등의 군사와 연합하여 해하(垓下)에서 항우의 초나라 군대와 최후의 일전을 벌여 초나라 군대를 섬멸했다. 항우는 달아나다가 오강(烏江)에 이르러 자결했고, 유방은 마침내 천하를 차지했다. 건곤일척(乾坤一擲)은 천하를 얻는냐 잃느냐, 죽는냐 사느냐 하는 대 모험을 할 때 곧잘 쓰이는 말이다.<국전서예초대작가·서실운영, 前대전둔산초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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