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 대원 전무이사(수필가)

나만의 공간이 그리운 시간이다.

쓸쓸한 그림자를 지우고자 이층 서재로 오른다. 방문을 닫고 의자에 오도카니 앉으니 세상이 조용하고 편안하다. 세파에 휩쓸려 여유 없이 허둥지둥 살아온 여러 날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 분명하다. 진정 그리워한 이 공간을 잊고 산 것이다.

책상 위에는 읽던 책이 서너 권, 탁자 주변엔 책이 무덤처럼 여기저기 쌓여 있다. 빈 곳이라야 겨우 두어 사람 앉을 정도의 공간이다. 문득 좁쌀만 한 산방에서 유유자적 살아간 황상이 그리워진다. 일찌감치 공간의 미학을 섭렵한 황상의 '일속산방(一粟山房)'의 기운이 이러할까.

공간은 사람이 존재해야 그 진가를 올린다. 평소에는 빈 둥지 같은 집이다. 스무 명의 가족이 남기고 간 거실엔 쓸쓸한 기운이 감돈다. 명절 저녁 절집처럼 고요한 집안에 친정 가족이 모여 정다운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밤이 새도록 공간을 채우던 가족이 쓰나미처럼 휩쓸고 가니 공허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특히 손녀의 웃음소리가 공명처럼 울려 퍼진다.

혼자만의 공간은 연령대별로 다른 것 같다. 요즘 십 개월 된 손녀가 이불을 자주 들춘다. 이불속이 자궁처럼 아늑한가 보다. 그것을 본 딸이 거실 귀퉁이에 작은 삼각 텐트를 설치해준다. 아이는 텐트 속을 수시로 드나들다가 오늘은 그 속에서 놀이에 몰입 중이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아이는 그 소리가 싫은지 상대를 보지도 않고 손안에 든 블록을 집어던진다. 말 못 하는 아이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당신이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듯 아이는 놀이에 집중한다. 철학자 플라톤이 동굴에 든 인간으로 비유한 것이 이 때문인가 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동굴 속에 갇혀 성장하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자궁 밖 세상을 보자마자 두려움의 첫울음을 터트리는 것이 그 증거이다. 하지만 동굴 속에서 인간의 눈에 비친 것은 허상, 벽에 비친 그림자일 뿐이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동굴 밖 세상을 보고서야 그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 보면, 온몸으로 부딪쳐 체험과 명상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깨우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평생 고집과 아집, 무지 속 공간에 갇혀 사는 꼴이다.

다수를 위한 공간도 좋다. '달보드레'는 문우의 아지트다. 세상의 불순한 욕망은 끼어들 틈 없는 순수 의지의 공간이다. 여덟 명이 끼여 앉을 수 있는 두 평 남짓한 이 공간을 비좁다고 투정하는 사람이 없다. 한결같은 마음은 아마도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동지의식이 아닐까 싶다. 작은 공간에서 어깨를 맞대고 눈을 마주 보고 인간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수없이 나눈다. 까만 밤을 사르며 어떤 꽃보다 아름다운 문학의 꽃을 피우는 중이다. 이곳에서 누군가는 무딘 감정을 순화하고, 또 누군가는 작가의 꿈을 이룬다.

인간은 공간을 벗어나지 못한다. 당신이 어디에 머물든 공간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공간 속에서 보호받길 원한다. 무인도에서 자신을 보호할 공간을 제일 먼저 찾는 것과 같다. 심지어 모든 것을 비우고자 애쓰는 수도승의 면벽 수행조차도 공간 안에서 이뤄지지 않던가. 온갖 욕망에 절은 사람은 물질만 쫓고 있어 공간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세계만 보기 때문이다. 나를 에워싼 공간의 무한한 조력과 의미를 무시한 채로 삶은 이어진다.

가끔은 혼자만의 공간에 머물길 원한다. 무한 시공간에서 책 속 선인도 만나고, 부질없는 욕망도 잠재우고, 오늘처럼 쓸쓸한 마음도 어루만진다. 팍팍한 일상 속 지친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내 안의 잠재한 의식을 깨우고, 진정한 나의 소리를 듣고 싶다. 오감이 되살아나 파닥이는 모습, 상상만 해도 새롭다. 밤의 초침 소리가 커지는 이 시각, 돌아오지 않은 사람을 부른다. '그대여, 지금 어느 공간에 머물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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