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규의 서예이야기 339

양홍(梁鴻)은 자(字)가 백란(伯鸞)으로 부풍(扶風) 평릉현(平陵縣) 사람이다. 아버지는 왕망(王莽) 때 성문교위(城門校尉)로 북지(北地)에 살다가 거기서 죽었다. 양홍은 어린 나이에 난세를 만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돗자리에 아버지를 말아서 매장했다.

후에 양홍은 태학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가난하지만 절조를 숭상했고 널리 책을 읽어 두루 학식을 쌓았다.

공부를 마친 후 양홍은 상림원(上林苑)에서 돼지를 사육했는데 그만 실화(失火)를 하여 다른 집들까지 태워 버렸다.

그는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돼지로 손실을 갚았다.

어떤 사람이 돼지로는 보상이 부족하다고 하자 양홍은 자기에게는 다른 재산이 없으니 그의 집에서 일을 해 주는 것으로 보상하겠다고 했다.

주인이 허락하자 양홍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성실하게 일했다.

이러한 소식이 온 마을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양홍이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고 하며, 양홍에게 일을 시킨 사람더러 지나치다고 비난했다.

이웃의 노인은 양홍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보고 그 주인을 비난하고 양홍의 성실함을 칭찬했다.

주인도 양홍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고 돼지를 돌려주었지만 양홍은 받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양홍의 높은 절조를 흠모하여 자기 딸을 시집보내려고 했으나 양홍은 모두 거절했다.

같은 마을의 맹씨 집에 딸이 있었는데 몸은 뚱뚱한데다가 얼굴은 시커멓고 몹시 추했다.

힘은 장사여서 돌로 된 큰 절구를 들어 올릴 수 있었는데 나이 30이 되도록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가 결혼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묻자 그녀는 “양홍처럼 덕 있는 사람이라면 시집을 가겠습니다”고 대답했다.

양홍은 이 소식을 듣고 예를 갖추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기로 했다.

여자는 베옷, 짚신, 방직용 광주리, 새끼 꼬는 기구 등을 구해 놓고는 시집가는 날에 화장을 하고 잘 차려입고 갔다.

그런데 결혼 후 며칠이 지나도 양홍이 색시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색시가 궁금하여 그 까닭을 물었다.

양홍은 “내가 원했던 부인은 비단옷을 걸치고 짙은 화장을 하는 여자가 아니라 누더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깊은 산속에서라도 살 수 있는 여자였소”라고 대답했다.

양홍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 아내는 늘 밥상을 눈썹 높이까지 받들어 올렸다.(거안제미:擧案齊眉)

행복한 삶을 누리는 데 돈이나 명예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이다.

<국전서예초대작가·서실운영·前대전둔산초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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