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20 잃어버린 대전 비행장
4차산업혁명 수도… 공항은 필수
30여년전 탄방동·시청… ‘비행장’
지금은 보라매 공원에서 추억만…

▲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대전에 비행장이 있었다. 현재 대전시 서구 탄방동, 대전상공회의소와 은하수 아파트, 대전시청 일대가 바로 대전 비행장 자리. 사진은 보라매 공원. 대전 찰칵 제공
새해 들어 여기 저기 비행장을 만들자는 소리가 높아 가고 있다. 그 불을 당긴 것이 전라북도의 새만금공항에 대한 예타(예비타당성조사) 면제가 발표되면서 인데, 충남에서도 서산 해미 군비행장을 공항활용이 가능한 비행장으로 만들자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고, 대전지역에서도 그런 주장이 대두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사실 전남 광주에 4개의 공항이 있고 경남, 울산, 부산에 3개의 공항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청주공항 단 1개를 갖고 있는 충청권으로서는 목소리를 높일 만 하다. 특히 대전, 충남, 세종에는 1개의 공항도 없지 않은가.

정성욱 대전상공회의소 회장은 앞으로 대전이 4차 산업혁명의 수도가 되려면 공항은 필수적이라는 주장이다. 그동안 산업혁명의 물류는 선박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부산, 울산, 마산 등이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의 4차 산업은 시간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 바다에 떠다니는 선박으로는 경쟁에 나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전은 안타까운 사실(史實)을 하나 지니고 있다.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대전에 비행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현재 대전시 서구 탄방동, 대전상공회의소와 은하수 아파트, 대전시청 일대가 바로 대전 비행장 자리. 이 일대는 소나무 숲이 S자형으로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으나 지금은 대전시청 네거리와 까치네거리 사이에 '보라매 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모형 비행기를 전시, 비행장으로서의 추억만 시민들에게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1941년, 미국과 일본의 소위 태평양 전쟁이 점점 긴박하게 돌아가자 일본은 미군이 한반도로 상륙할 경우 주력 부대를 대전 인근의 산악지대로 유인하여 결전을 벌이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은 서울 용산에 있던 조선군 사령부를 대전으로 옮겨 대전중학교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대전비행장 공사에 착수, 미군과의 최후 결전을 철저히 준비해 나갔다. 대전비행장 공사에는 대전지역과 공주, 유성에 있는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시켰다. 일본은 이를 '성전'(聖戰)이라는 미명으로 학생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시켰으며 우선 900m의 활주로만 갖추는 엉성한 비행장을 만드는데 급급했다.

따라서 일본은 제대로 대전비행장을 사용하지도 못하고 해방을 맞았으며 이어 6·25전쟁 때는 온 몸으로 전화의 수렁 속에 빠져 들었다. 1950년 7월 2일 윌리엄.F.딘 소장은 미24사단장으로서 한국전에 투입된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B-54 수송기를 타고 일본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부산의 수영비행장에 도착하려고 했으나 활주로를 연장할 공사가 끝나지 않아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딘 장군은 이튿날 짧은 활주로에서도 착륙이 가능한 L-9 경비행기로 갈아타고 수영비행장에 이르렀으나 이번에는 짙은 안개로 착륙이 불가능해 대전비행장으로 기수를 돌렸다. 그러나 막상 대전비행장 상공에 이르자 수영비행장 보다도 더 짧은 활주로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관제탑의 통신도 가동되지 않는 등 엉망이었다. 그렇게 일본의 대전비행장 공사는 날림이었다. 그래서 딘 장군은 착륙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국 종군기자로 한국전을 취재했던 퍼렌 버그의 '이런 전쟁'에 보면 이와 같은 숨 가빴던 순간들이 잘 묘사돼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딘 장군은 일본으로 돌아와 30분도 쉬지 않고 다시 대전비행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망설이는 조종사에게 "이것은 명령이다! 착륙하라!"고 단호하게 지시한다. 그리하여 조종사는 대전 상공을 몇 번 맴돌다 드디어 착륙을 시도, 아슬아슬하게 활주로 끝에서 겨우 기체가 멈출 수 있었다.

이때가 1950년 7월 3일 오전 10시. 그러나 딘 장군의 진두지휘에도 인민군의 남하는 계속되어 7월 18일 금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미군은 대전비행장에 사단 지휘소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튿날 유성에 까지 적의 공격이 시작되고 북한 공군기의 대전비행장 폭격이 있자 지휘소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전쟁의 상처를 겪은 대전비행장은 1952년 항공병학교로 그리고 1956년부터 1988년 둔산 신도시가 건설될 때까지 공군기술교육단이 존속돼 왔었다. 그때 대전비행장을 멋진 국제공항으로 만들 생각을 왜 못했을까?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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