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 19 동학군의 우금치 전투] 
동학군 공주 이인 전령 후 북진, 정부·일본군 매복… 전력 천지차
우금치 패전… 남은 건 500명뿐, 전봉준도 검거… 형장의 이슬로

▲ 공주에 있는 우금치 전적비. 공주시 제공
노란 깃발을 든 전봉준의 동학 농민군은 충남 논산에서 손병희의 충청지방 동학군(북접군) 10만과 합류함으로써 사기가 높을 대로 치솟았다. 전봉준은 먼저 전투병력을 이끌고 논산을 출발, 공주로 향했다.

이들이 처음 정부군과 접전을 벌인 곳은 지금의 공주시 이인면에 있는 효포였다. 1894년 10월 23일, 전투라고 할 것도 없이 동학군은 쉽게 무너지는 것처럼 하다 이인을 점령했다. 그리고 계속 북진했다. 그들은 공주를 점령하고 서울로 향할 참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전진을 막아선 것이 공주가 내려다보이는 우금치. 2500명의 정부군이 우금치에 매복하여 동학군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이두황이 이끄는 부대는 우금치 서쪽을, 그리고 이금태가 이끄는 부대는 동쪽 능선에 진을 쳤다.

그러나 정부군 보다 무서운 것은 일본군이었다. 일본은 '척왜(斥倭)'를 부르짖는 동학군을 아예 없앨 작정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미나미 고이지로 소좌가 책임자가 되어 정보수집과 작전계획을 마련하고 있었으며 모리오 마사이치 대위가 그 정예요원 200명을 이끌고 공주에 나타난 것이다.

일본군은 숫자는 200명에 불과했지만 제대로 전술 교육을 받았고 기관총과 같은 신식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다 일본군은 전술적으로 공격과 방어, 모두가 뛰어난 우금치의 제일 높은 위치 '견준봉'에 부대를 배치했다. 지형적으로도 전투를 하기에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나 마찬가지 였다. 그렇게 되면 폭 800m에 길이 1200m의 좁은 계곡에 동학군은 몰릴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기관총의 표적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정부군의 공격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본의 역사학자들 가운데 우금치 전투는 일본의 참여없이 조선 정부군과의 싸움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우리 정부군을 일본 장교가 훈련시키면서 소위 '별기군'이라 하여 복장까지 일본군과 비슷하게 한데서 나온 오해였다.

12월 5일(음력 11월 9일) 쌀쌀한 날씨속에 불을 품은 우금치의 충성은 1주일 동안 50여회나 계속되었으니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전투가 계속될수록 동학 농민국의 피해는 자꾸만 늘어 갔다. 공주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출입문 같은 역할을 차는 우금치, 높지도 않으면서 좌우 능선과 계곡이 전술적으로 공격하는 측에 불리할 수 밖에 없는 우금치, 전봉준은 순박한 열정과 애국심만 앞세우고 이와 같은 전술적 분석에는 소홀했음을 깊이 후회했는지 모른다.

물론 그 역시 나름대로 공주 함락의 작전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유구 방면에서 공주를 협공하는 가운데 우금치를 공격하는 것이 었는데 그런 것이 뜻대로 되지 않은 것.

결국 전봉준은 후퇴를 명령하고 자신도 우금치를 빠져 나와 남쪽으로 몸을 숨겼다. 많은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가 목숨을 잃었으며 살아 남은 숫자가 겨우 500명에 불과했으니 너무 참혹한 패배였다.

그리고 동학 농민군을 총지휘했던 전봉준도 결국 전라도 순창에 숨어 있다가 부하의 밀고로 붇잡혀 서울로 압송됐는데 그 가는길이 처절한 싸움을 벌였던 공주 우금치를 지나 금강을 건너는 것이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에 대한 재판이 일본 공사에 의해 진행됐다는 것. 그리고 그가 지도자로서 비록 그의 원대한 것이 무너졌지만 일본 공사앞에 소신과 기개를 굽히지 않았고 그들의 회유에도 흔들림 없이 1895년 4월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사신이다.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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