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란 충북무심수필문학회 사무처장

안경의 쓰임새는 제각기 다르다. 근시나 원시안을 교정해 주고, 먼지나 바람 혹은 강렬한 햇빛이나 설광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며, 흉터를 감추거나 멋을 부리는데 쓰인다. 안경은 문명의 이기이지만 현대인에게 교정기요 보장구고 유리창이요 액세서리다. 내게 안경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 중 하나다. 까만 테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다니시던 모습이 기억 속에 또렷이 박혀있다.

나는 아버지처럼 안경을 쓰는 것이 소원이었다. 아버지가 벗어 둔 안경을 몰래 쓰면 도수가 맞지 않아 바닥이 울퉁불퉁 거려 우주를 걷는 것 같아도 멋져 보여서 좋았다. 소원대로 중학교 갈 무렵 안경을 쓰게 됐다. 나는 그 후에 알았다.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안경이 얼마나 불편한지…. 얼마 전부터 학원 수업하기가 불편해졌다. 교재의 활자가 희미한 안개 속에 갇혀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안과 진찰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노안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거부하고 싶은 단어다. '피곤해서 생기는 일시적인 현상일 거야.' 억지 생각을 하며 병원을 나왔다.

스마트폰이 소통의 도구가 되고, 평소 책이나 신문을 읽어야 하는 직업을 가진 내가 벌써 노안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벌써 그럴 나이가 되었다는 것에 서글픈 생각도 들었다. 그냥 버티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미간에 힘을 주는 일이 반복 되니 노안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온 나라가 미세먼지에 휩싸여 있다. 적페 청산, 진보와 보수의 논쟁, 민생은 뒷전이다. 국민들은 안경 너머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사람도 사라진다. 기계가 인간의 영역을 대신해 소통과 배려가 줄어들고 반목과 불신만 쌓여 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을 가리고 있다. 새로 맞춘 안경을 쓰고도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전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세상이 진짜 세상인지, 안경을 쓰고 본 세상이 진짜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현대 문명의 상징물 안경 너머로 벌어지는 일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애국자가 누구인지, 서로의 마음을 보려고 애쓰기는 하는지, 새로 바꾼 안경을 쓰고도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시야에 보이는 것만 아니라, 안경 그 너머, 그 안에, 그 밑에 흐르는 실체와 본질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서로의 이해관계가 복잡해지고 있다. 도대체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통찰력 부재인 시대이다. 그것은 바로 '보는 눈'에서 시작된다. 통찰력의 부재는 주어진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요. 필요한 사람을 제대로 세우지도 못한다. 결국 정의로운 세상까지 잃어버리게 할 뿐이다. 인간은 인식하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안경은 물리적으로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 고마운 존재요. 도구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경 너머 보이지 않는 세상까지도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안경을 항상 깨끗하게 닦아야 하듯이, 더러는 마음의 창도 닦아내야만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노안이 오듯이 내 눈을 가리는 것이 무엇인지 사물을 꿰뚫어 보는 지혜로운 혜안(慧眼)의 눈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새로 산 안경을 쓰고 집을 나섰다. 전에는 바쁜 일상에 급급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풍경들이 오늘은 다르고 새롭게 보인다. 안경 윗부분으로 보이는 세상이 맑고 깨끗하다. 봄바람이 불고 있고, 봄꽃들과 나뭇가지들의 작은 흔들림도 보인다.

시선이 안경 아랫부분에 닿았다. 사람들의 표정만 아니라 마음마저 또렷이 읽힌다. 안경을 쓰고 바라 본 세계와 안경을 벗고 바라본 세계가 모두 진짜인 그날이 꼭 오기를 바란다. 미세먼지로 희뿌연 날이 가시지 않아도 안경 너머까지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기 위해 생각의 지평을 넓혀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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