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18 동학농민군의 봉기
1860년 최제우 창립… 열강 이권다툼·관리들 부패에 교세 팽창
충청지방 온건·전라도 강경… 제2차 봉기, 청일전쟁으로 이어져

▲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이 1893년 4월 충북 보은에서 집회를 열 당시 2만명이나 되는 신도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사진은 보은에서 열린 동학 125주년 기념행사 모습. 보은군 제공
동학(東學)은 최제우를 제1대 교주로 1860년 창립되어 농민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동학의 세확장에 불안을 느낀 정부는 창립 4년만에 교주 최제우를 체포하여 '혹세무민'죄로 처형을 하기에 이르렀고 동학도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세력다툼이 노골화 되고 국민들의 생활이 핍박을 받게 되는가 하면 관리들의 횡포와 부패가 극심해 지자 동학의 교세는 다시 팽창하기 시작했다. 특히 제2대 교주 최시형의 포교 능력이 뛰어나 1893년 4월 충북 보은에서 집회를 열고 교조의 명예회복을 요구할 때는 2만명이나 되는 신도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기도 했다. 이처럼 세가 불어나자 이제는 교조의 명예 회복뿐 아니라 탐관오리의 응징, 일본과의 단절, 노예 해방 등 정치개혁에 까지 목소리를 높였고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일본과 서양세력을 물리치고 대의를 세우자)는 깃발도 내걸었다.

대체적으로 충청지방의 동학은 손병희 (3·1운동때 독립선언서 33인의 대표) 등의 온건적인 노선이었으나 전라도 지방의 동학교도들은 강경노선이었고 그 대표적 인물로 김개남, 전봉준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은 기류에 대해 한영우 교수는 '다시 찾는 우리 역사'에서 전라도 농민들이 그만큼 수탈과 탐관오리에 의한 피해가 컸기 때문이라곤 지적했다.

여기에 불을 지른 것이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 조병갑은 만석보 수세(水稅)를 무리하게 징수하면서 농민들의 원성을 샀고 자기 아버지의 비각을 세운다고 농민들로부터 막대한 금품을 끌어 모았던 것.

그리나 전봉준은 1894년 2월 1000여명의 농민을 이끌고 고부군수의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농민들을 괴롭힌 아전들을 처벌했다. 창고에 있던 양곡도 모두 압수했다. 전봉준의 농민군은 전라도 감영이 있는 전주까지도 손에 넣었으며 그해 6월에는 전라도 일대가 거의 동학 농민군의 장악하에 들어 갔다. 이 무렵에는 농민군의 수도 8000명을 넘어 설 정도로 불어 났다.

물론 정부도 그냥 있지 않고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 관군 800명을 파견하였으나 농민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때 뜻밖에도 청나라 군사가 동학군 진압에 나서기로 하고 일본 역시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자 정부와 동학군은 휴전 협상 끝에 '전주화약'(全州和約)을 체결하고 싸움을 멎었다.

이로써 전라도 지방에 평화가 찾아 오는가 했지만 1894년 10월 '전주화약'은 파기되고 제2차 동학 농민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무능한 정부가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기위해 청에 파병을 요청하자 청군 3000여명이 충남 아산만에 상륙하고 이에 즉각적으로 맞대응에 나선 7000명의 일본군이 인천을 통해 상륙하는가 하면 우리 궁궐을 송두리째 점령해 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렇게 우리 정부의 실책으로 청·일 양국군을 이땅에 불러 들임으로써 결국 청일전쟁으로 번졌으니 참으로 개탄스런일이었다.

이에 동학군은 크게 격분, 모든 것 다 제쳐 놓고 오직 '척왜(斥倭)를 목표로 제2차 봉기에 나섰으니 이것이 동학군 최후의 결전이 된 공주 우금치 전투를 불러 오고 말았다. 마침내 '녹두 장군'으로 일컫는 전봉준의 동학 농민군은 손병의 북접주에 속한 농민군과 1894년 10월 충남 논산에서 합류하였으니 그 수가 10만명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사기도 드높이 공주 감영을 점령하기 위해 진군을 시작했다. 우금치 전투의 폭풍전야였다.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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