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 대원 전무이사(수필가)

뜻밖의 선물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아들이 검은 상자를 불쑥 내민다. 상자를 열어보니 오래된 타자기다. 노상에 나온 타자기를 보니 글을 쓰는 어머니가 떠올랐단다. 아들은 남의 나라에서 공부하며 부모가 매우 그리웠던 모양이다.

타자기는 예전 문방사우로 말하면 붓과 먹, 벼루일 것이다. 컴퓨터가 나오기 전 타자기는 대단한 물건이었다. 무엇보다 작가에겐 상징적 물건이다. 현재는 한물간 물건이지만, 그 의미만큼은 살아 숨 쉰다. 아마도 더 좋은 작품을 쓰라는 의미일 것이다.

낡은 타자기 뚜껑을 여니 먼지가 가득하고 녹슨 부분도 보인다. 먼지도 털어내고 윤활유로 녹도 제거한다. 손가락으로 활자를 누르니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자가 완성되는 것이 아직 쓸 만하다. 타자기를 보고 있으니 꿈 많은 고교시절이 떠오른다. 80년대 초 컴퓨터가 없던 시절 타자 실력을 늘리고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두한 적이 있다. 대기업에 취업하여 유니폼을 입고 타자기를 두드리는 꿈을 꾸었던 시절이다.

타자 일급수의 열 손가락은 사람의 손이 아닌 것 같다. 마치 피아니스트가 눈을 감고 음률을 느끼며 피아노 건반을 감각으로 두드리듯, 타자수 또한 자판을 보지 않은 자세로 열 손가락이 신들린 듯 짧은 시간에 문서 작성을 마친다. 타자를 치는 소리가 경쾌한 음악 소리로 들릴 정도면 신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컴퓨터가 보급되는 바람에 타자 실력을 세상에 마음껏 펼쳐보지도 못하고 변화의 급류에 휩쓸려갔다. 한순간에 타자기가 퇴물이 된 것이다. 사무실에 컴퓨터가 늘어날수록 타자기는 밀려나고 이젠 추억의 박물관에 가야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손가락으로 익힌 기술은 몸이 기억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든 자판에 두 손을 얹으며 자판 위를 자유롭게 누빈다. 누군가는 회사원을 꿈꾸고, 또 누군가는 작가의 꿈을 꾸었으리라. 그렇게 타자기에 꿈을 심었던 것 같다.

손안에 '미니 타자기' 세상이 올 줄 누가 알았으랴. 핸드폰 문자를 보내려면 자판을 불러내 손가락으로 문자를 두드려야만 한다. 자판은 타자기의 자판과 비슷하여 타자수는 월등히 유리하다. 타자기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 문자를 두드리는 걸 보면 엉성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양손의 엄지만 사용하는 사람을 '엄지족', 한 손가락으로 독수리가 먹이를 콕콕 집어 먹듯 두드린다고 하여 '독수리타법' 이란 신조어가 생겨난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작가가 될 줄 예견한 것인가. 여고시절 갈고닦은 타자 실력이 큰 도움이 된다. 자판을 보지 않고 아니 눈을 감고도 자판을 즐기니 무엇이 부러우랴. 책상 옆 바로 시선에 드는 위치에 타자기를 앉히고 바라본다.

아들은 타자기만이 아닌 잃어버린 꿈과 몸 안에 잊고 산 감성을 선물한 것이다. 돌아보니 타자기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에 삶의 애환을 어루만지고, 누군가의 꿈도 이뤄 준 것이다. 타자기는 삶의 문화유산이다. 오래된 타자기에 손을 얹으니 열아홉 살 소녀의 꿈이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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