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일제 탄압으로 19명 순국… 유관순 열사 외엔 잘 몰라
김구응 열사 만세운동 주모… 현장서 숨져 공적자료 부족
신을우 열사 유공자 비인정… 유족 호적 착오 주장에 심사 보류

[충청투데이 조선교 기자] 100년 전 충남 천안 병천면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의해 순국한 19명의 열사가 있다. 이들 중 14명은 일본 헌병의 총칼에 피를 흩뿌리며 당시 현장에서 숨을 거뒀고 나머지 열사들도 부상을 이겨내지 못하거나 옥중에서 고초를 겪다 순국했다.

이 가운데 3·1운동의 상징으로 회자되는 유관순 열사와 그의 가족에 대해선 비교적 널리 알려졌지만 아우내 만세운동의 또 다른 주역인 김구응 열사와 나머지 인물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흔치 않다. 특히 최근 대한민국장에 추서된 유 열사를 비롯해 대부분의 열사들이 애국장 등 서훈에 추서됐지만 한 세기가 지나도록 공적을 전혀 인정받지 못한 인물도 있다.

28일 유관순열사기념관과 천안향토문화연구회 등에 따르면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기미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순국열사는 김구응, 김상헌, 박병호, 박상규, 박영학, 박유복, 박준규, 방치성, 서병순, 신을우, 유관순, 유중권, 유중오, 윤태영, 윤희천, 이성하, 이소제, 전치관, 최정철, 한상필 등이다.

병천지역 유지이면서 병천교회 진명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김구응 열사는 당시 아우내장터에서 일본 헌병의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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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내 만세운동 이듬해 이를 최초로 다룬 김병조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사략'과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선 김 열사를 주모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가 '남녀 6400명을 소집한 뒤 독립을 선언했고 이때 일본 헌병이 조선인 기수를 해치자 헌병을 꾸짖던 중 총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했다’는 내용 등이다. 김 열사가 숨을 거둔 뒤 그의 모친인 최정철 열사가 일본 헌병을 크게 질책하자 모친마저 창으로 찔러 해쳤다는 내용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하지만 1991년 애국장에 추서된 김 열사의 공적조서에서는 그를 주모자로 소개하지 않고 있다. 지역 사학자들은 김 열사가 당시 만세운동의 또 다른 주역이었지만 현장에서 순국하는 바람에 신문과 재판기록 등 공적을 뒷받침할 자료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19명의 순국열사 중 유일하게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인물로는 신을우 열사가 있다. 국가기록원에서 보관 중인 피살자 명부에는 신 열사의 성명과 순국 장소(천안 병천면), 순국 일시(4월 1일) 등이 기록돼 있다.

다만 신 열사는 순국 당시 호적이 없었는데 그의 아들이 자신의 호적을 등록할 때 실제 부친을 부르던 다른 이름(신천여)을 기입했다는 게 향토사학자와 유족들의 주장이다. 국가보훈처에선 유족의 족보에서 '신을우'가 일부분 확인됐지만 여러 상황을 종합할 때 두 인물을 동인인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해 심사를 보류한 상태다.

이와 함께 당시 호서지방 최대 규모로 거행된 아우내 만세운동에선 일본 헌병이 시신을 탈취해 오늘날까지 신원조차 확인할 수 없는 10여명과 부상자 30여명, 또 운동에 참여했단 이유로 태형 등 고초를 겪은 인물도 여럿 있지만 공적을 전혀 인정받지 못한 사례가 다수 전해지고 있다.

천안지역 대표 향토사학자인 임명순 씨는 "당시 병천에는 유관순 열사 외에도 만세를 부르며 주도적으로 나선 김구응 열사 등 여러 인물이 있었다"며 "좀 더 당시의 역사를 깊게 들여다보고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선교 기자 mission@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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