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수 대전시 대덕구 감사평가실장

필자는 시스템주의와 관료주의의 관행을 적나라하게 다룬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고 공직자로서 깊은 생각에 잠긴 적이 있다. 남성과 여성 2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 영화가 공직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시사하는 바가 컸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발병으로 일을 못하게 돼 수입이 사라진 남자주인공 블레이크. 그는 생활을 위해 질병수당을 신청한다. 그러나 신청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해 이내 반려되고, 블레이크는 살기위해 다시 실업수당을 신청한다. 이마저도 ‘인터넷 신청만 가능하다’는 직원의 말에 평생을 목수로 살아온 그의 억장은 무너질 것만 같았다. 결국 블레이크는 정부 지침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실업수당을 받지 못하게 된다. 블레이크는 억울함을 법원에 호소해 보지만 결과를 지켜보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중략)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블레이크가 항고문을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은 그의 장례식에서 유서로 읽혀졌다.

또 다른 주인공 케이티는 혼자서 딸과 아들을 키우는 미혼모다. 구직활동 중인 케이티에게 유일한 수입원은 생계보조수당이다. 추운 겨울 차디찬 실내에서 케이티 가족이 의지하는 것은 촛불 4개가 전부다. 그러던 그녀에게 유일한 수입인 생계보조수당이 끊긴다. 구직센터 상담시간에 늦었다는 이유에서다.

평생을 목수로 살다가 심장병을 얻은 50대 후반 남성과 두 아이를 키우는 20대 미혼모가 주인공인 이 영화는 성실하게 일한 한 시민과 행정의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으로서 응당 받아야할 권리 인정과 대우를 거부하는 공직사회의 불합리한 높은 벽이 한 시민에게 갑질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최근 한국행정연구원에 따르면 공직자의 윤리의식 개선에 대한 설문에서 현직 공직자의 긍정 답변이 80.3%인 반면, 일반국민은 38.4%였다. 지난 시간 관료주의의 보이지 않는 갑질에 시민들이 그동안의 암묵적인 침묵을 깨고 당당하게 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반영한 결과로 읽혀진다. 공공기관의 경우 업무 추진의 고도화 과정에서 효율성과 형평성을 위해 엄격한 상하관계와 기계적 판단이 요구돼 온 것이 사실이다. 이로 인해 정책의 수립이나 추진이 서비스 개념보다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강화시켜나가는 방향으로 진행돼 오면서 국민이 생각하는 공공서비스에 대한 인식과는 거리가 있어왔다.

이런 가운데 최근 국무조정실에서 배포한 ‘공공분야 갑질 근절을 위한 가이드라인’이 공직사회 변화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가이드라인은 △법령 등 위반 △사적이익 요구 △부당한 인사 △비인격적 대우 △기관 이기주의 △업무 불이익 △부당한 민원응대 △모임 참여 강요 등 기타 총 8개 유형에 대한 판단기준과 대응 방안 등을 제시하고 있다. 내·외부적으로 분권시대 공무원의 소양을 새롭게 정립하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담긴 조치다. 국무조정실에서도 공공분야 갑질에 대한 최소한의 판단 기준과 처리절차 등을 제시해 갑질을 근절하고 상호 존중하는 사회적 풍토를 조성키 위해 마련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시스템적인 변화로 공직자의 인식 또한 함께 변해야 비로소 상호 존중하는 사회적 풍토 조성이 가능하다. 갑질 근절 가이드라인이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지 않도록 공직자들 스스로가 초심을 갖고 능동적으로 변화를 이끌어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그 마음이 닿는다면 주민들의 신뢰가 회복되고 자연스레 응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