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형 을지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을 때 반찬을 잘게 썰거나 잘라서 준다. 김치는 작게 썰고 맑은 물에 담가 매운 맛을 빼서 주기도 한다. 한 숟갈 담아 한 모금 먹이려면 아이들의 입에 맞게 잘 디자인해야 한다. 짧은 시간 많은 생각을 해야 하고 기술도 필요하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아이의 입에 가져다주면 아이는 입술과 혀, 코를 갖다 대고 먹을 수 있는 지 없는 지를 순간 가늠한다. 조금이라도 기호에 맞지 않으면 거부하거나 한 모금 무는 순간 이내 뱉어 버린다. 그러면 먹을 것들을 다시 디자인해야 한다. 애들 밥상은 전쟁터라고 했던가. 날마다 반복되는 먹고 먹이기 과정 속에 엄마 아빠는 어느 덧 전사가 된다.

3년 전 일이다. 셋째를 임신했을 때 아내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처방이 내려져 홀로 수개월간 먹이기 숙제를 고스란히 떠맡게 되었다. 잘 먹게 하려고 참 많은 고민을 했다. 음식 솜씨는 없었기에 할머니가 해 온 반찬으로 애들 구미에 맞게 디자인했다.

그러나 시행착오는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을 다그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하루 이틀 애쓰다 보니 아이들도 조금씩 나의 디자인에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많이 먹고 골고루 섭취하는 아이들 모습만큼 부모로서 느끼는 기쁨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때의 성취감은 꽤 컸다.

나는 아이들의 성장과 관련된 진료를 한다.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보면 식이습관은 여전히 성장 둔화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생후 2세까지는 먹는 것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키가 자란다. 먹는 것으로부터 성장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때문이다. 이때 적게 먹거나 충분한 영양소가 섭취되지 않으면 성장은 둔화되고, 나중에 잘 먹는다 하더라도 키 손실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쁘게 일하는 젊은 부부들에게 먹는 양과 영양소를 일일이 고민해 가며 챙겨주기란 여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안쓰러워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가족 간에 갈등 요인이 되고 있다는 현실 앞에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사춘기 시기에도 여전히 식이습관은 성장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사춘기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찾아와 아이의 식이에 대한 걱정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차분히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아침 끼니를 거르거나 대충 챙겨먹는 것은 드물지 않은 현상임을 알게 된다. 간식이 주식을 대체하고, 늦은 시간까지 공부를 하다 보니 야식이 일상화 되는 경우도 흔하다.

늦은 시간 음식 섭취는 다음 날 아침 식사를 거르게 하는 주된 이유가 될 뿐만 아니라 소화불량과 복통의 주된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먹고 싶을 때만 먹고 당기지 않으면 쉽게 끼니를 거르는 현상이 반복되게 된다. 여기에 운동과 수면부족이 겹치니 성장에 필요한 주된 세 가지 요소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성장을 저해하게 된다. 이런 현실이 지금도 계속 반복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키가 작아서 고민이라는 청소년들에게 가끔 이런 설명을 할 때가 있다. '자동차가 달리려면 기름이 있어야 하고 오래 달리려면 기름이 충분해야 한다'고.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당연하기에 이 한마디 말을 건네고 싶은 간절함이 있다. 이 말이 얼마나 그 아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싶지만, 가끔 이 말을 듣는 아이들 중 몇몇은 고개를 끄덕인다. 또 몇몇은 뭔가를 깨달았는지 입가에 미소를 띠기도 한다. 한참 지나 나의 전자 메일로 본인의 꿈을 고백해주었던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가능한 아이들과 저녁 밥상을 같이 하려고 한다. 하루 업무에 지친 몸이지만 이 아이들이 맞이하게 될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아내가 차려준 반찬을 오늘도 디자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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