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수 공주대학교 교수

지난 1월 19일 토요일 저녁, 서울 팔레스 호텔에서 카톨릭의과대학 교수님들께 ‘조선왕조의 특급비밀; 27명 조선임금의 삶과 죽음’란 주제로 강의를 했다. 흉부외과의 어느 선임교수께서 초청해준 자리였다.

강의 서두에 교수님들께 질문을 던졌다. “조선임금의 평균수명은 47세였습니다. 좋은 근무환경에다 좋은 음식까지 드시고 편히 사셨을 것 같은데 수명이 짧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러자 어느 한 교수님께서 “과도한 사랑 탓”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런 편견을 깨는 것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조선임금이 단명한 첫 번째 이유는 살인적인 업무스케줄에서 비롯된 스트레스였다고 생각한다. 임금은 새벽4시 종각에서 울려 퍼지는 33번의 종소리와 함께 기상했다. 간단한 죽으로 요기한 후, 부모님께 아침문안을 드려야했다.

그리고 조강(朝講)에 참석해서 경연관들과 함께 경전과 역사를 공부하며 국정현안을 논의했다. 그 다음 아침식사를 들고 조회를 주관했다.

조회는 조참(朝參)과 상참(常參)이 있는데, 조참은 매월 5, 11, 21, 25일에 6품 이상의 문무백관이 전원 참여하는 조회였고, 상참은 매일 마다 실시하는 약식 조회였다. 상참에는 의정부의 삼정승과 6조 판서를 비롯한 핵심요인들만 참석했다.

조회를 마친 임금은 각 부처의 실무관료들로부터 디테일한 업무보고를 받는 윤대(輪對)를 행했다. 이때 윤대 인원은 임금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1일 5인 이하로 제한했다.

이것을 마쳐야만 임금은 비로소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임금을 기다리는 것은 주강(晝講)이었다. 임금 다시 서책을 꺼내들고 경연관들과 공부를 하면서 국정현안을 계속해서 논의했다. 계속해서 이어진 행사는 접견(接見)이었다. 접견은 임금이 관료를 포함한 외부 인사들을 공식적으로 만나는 자리였다. 이것을 통해 임금은 시중여론을 들을 수 있었다. 접견의 핵심은 이임(離任)관료들을 위로하고 새로 보직을 맡은 취임(就任)관료들에게 임명장을 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끝나면 임금은 군사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병조의 실무관료는 매일 임금에게 궁궐의 수비책임자, 수비병력 수, 암구호 등을 보고하고 결제를 받았다. 군사업무는 반란을 막기 위한 사전조치로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했다. 그 다음에 임금은 석강(夕講)에 참석해서 공부한 후,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임금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상소문을 읽고 그에 대한 대책을 비서관인 승지들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부왕이나 대비전에 나아가 잠자리 문안인사를 드려야 했다.

그것으로 임금의 하루일과가 끝난 게 아니다. 이때부터 임금들은 을람(乙覽)을 했다. 임금의 독서를 을람이라고 한다. 이는 을야(乙夜; 저녁9시~11시)가 되어야만 임금에게 독서할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이렇다보니 임금들의 업무 스트레스가 엄청났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27명의 임금들 가운데 약 50% 가량이 극심한 종기와 눈병으로 고생했다. 업무 스트레스가 내적 화기(火氣)로 변해 곪아터진 것이 종기였고 독서와 상소읽기는 시력을 저하시켰다.

'대통령의 7시간'을 놓고 쩔쩔매는 현실을 보면서 국정 책임자들은 지금 어떤 자세로 근무하는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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