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한 겨울 숲의 매력

▲ 곰배령 정상 [사진/전수영 기자]
▲ 곰배령 정상 [사진/전수영 기자]
▲ 밧줄로 표시된 탐방로만 이용해야 한다. [사진/전수영 기자]
▲ 밧줄로 표시된 탐방로만 이용해야 한다. [사진/전수영 기자]
▲ 곰배령은 봄부터 가을까지 야생화가 만발하는 '천상의 화원'으로 유명하지만, 겨울 숲의 매력을 오롯이 누리기에도 좋다. [사진/전수영 기자]
▲ 곰배령은 봄부터 가을까지 야생화가 만발하는 '천상의 화원'으로 유명하지만, 겨울 숲의 매력을 오롯이 누리기에도 좋다. [사진/전수영 기자]
▲ 칼바람이 부는 곰배령 정상 [사진/전수영 기자]
▲ 칼바람이 부는 곰배령 정상 [사진/전수영 기자]
[걷고싶은길] 점봉산 곰배령 생태탐방로

적막한 겨울 숲의 매력

(인제=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해발 1천m 고지, 드러누운 곰의 배처럼 완만한 평원과 손타지 않은 원시림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야생화가 만발하는 '천상의 화원' 곰배령. 꽃은커녕 계곡물마저 꽝꽝 얼어버린 혹한의 날씨에 곰배령으로 향했다. 나무도 잎을 모두 떨구고, 한 달 넘게 끊긴 눈 소식에 눈꽃조차 스러져 헐벗고 적막한 이때가 겨울 숲의 또 다른 매력을 오롯하게 누릴 기회다.

사실 눈이 시리도록 하얀 눈 세상이 보고 싶었다. 곰배령을 오르는 들머리인 설피 마을은 겨울에 눈이 하도 많이 쌓여 눈에 빠지지 않도록 덧신는 설피(雪皮) 없이는 다닐 수 없는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강원도 역시 지난해 12월 초 이후 한 달 가까이 눈이 내리지 않았고, 기온도 높아 쌓였던 눈마저 대부분 녹아버렸다. 기대에 부풀어 급하게 새로 장만한 스패츠는 그만 무색해져 버렸다.

온화하던 날씨가 갑자기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지고 체감기온은 영하 18도를 기록했던 1월의 어느 날 아침, 굴뚝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산골 마을을 지나 설피밭길과 곰배령길이 만나는 곳에 있는 주차장 식당에서 난로에 따끈하게 데운 차 한잔을 얻어 마시고 오전 10시 입산 시간에 맞춰 점봉산 생태관리센터로 향했다.

신분증을 확인하고 파란색 플라스틱으로 된 입산증을 받았다. 하산 시간 등 주의사항을 들은 다음 탐방로로 들어섰다. 들이쉬는 숨에 코안이 싸해졌다.

◇ 손타지 않은 원시림 속으로

설악산에서 오대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길목에 있는 점봉산(1천424m) 남쪽 자락의 곰배령은 동쪽 진동리와 서쪽 귀둔리를 오가는 고개였다.

점봉산은 한반도 식물군의 남방계와 북방계가 만나는 원시림으로, 우리나라 식물 서식종의 약 20%에 해당하는 850여종이 분포한다. 1987년부터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입산이 통제됐다. 백두대간보호지역, 설악산국립공원에 속해 있기도 하다.

서울에서 가려면 7∼8시간은 족히 걸리는 오지 중의 오지였던 이곳은 양양고속도로 개통 이후 2시간 반이면 닿는 가까운 곳이 됐다.

입산 통제 22년 만인 2009년 7월, 곰배령 일부 구간을 개방하면서 입산 인원은 그해 하루 150명에서 현재 450명까지 늘었다.

연중 입산이 가능한 때가 많지 않다. 봄과 가을은 산불 조심 기간으로 입산이 안 되고 여름과 겨울에만, 그것도 일주일에 닷새(수∼일요일)뿐이다.

산림청 홈페이지(www.forest.go.kr)에서 예약한 사람만 허가증을 받아 정해진 시간에 입산할 수 있다. 동절기(12월 16일∼이듬해 2월 말)에는 오전 10시와 11시 단 두 차례뿐이다. 하절기(4월 21일∼10월 31일)에는 오전 9시에 한 차례 더 가능하다. 설피 마을, 강선 마을 등 진동리 마을에 숙박하면 별도로 입산할 수 있다.

◇ 겨울 숲에 울리는 소리

'천상의 화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야생화가 만발하는 시절이면 허용 인원을 꽉꽉 채운 탐방객이 줄을 이었을 테지만, 겨울 숲은 한없이 적막했다.

마지막 짧은 오르막을 제외하면 5.1㎞ 탐방로는 스틱이 거의 필요 없을 정도로 평탄한 편이다. 밧줄로 표시된 탐방로만 따라가면 되니 길을 잃을까 걱정할 이유도 없다. 쉬운 길이라고 서둘러 걸을 이유는 더더욱 없다. 천천히 걸으면 들리는 건 내가 내는 발소리와 숨소리, 옷깃 스치는 소리뿐이다. 발을 멈추면 오직 빈 나뭇가지를 훑는 바람 소리뿐이다.

양지바른 곳에서는 꽝꽝 언 계곡물이 볕을 받아 녹아내려 그 아래로 흐르는 물이 꿀렁꿀렁 소리를 내고 이름 모를 산새 우는 소리가 더해졌다. 나무가 우는 듯 갈라지는 듯 쩌적, 쩡∼ 하고 내는 소리는 고요한 겨울 숲에서만 들을 수 있는 자연의 소리다. 나무마다 매달린 이름표와 자기소개를 하나하나 읽다 보면 발걸음은 더욱 느려질 수밖에 없다.

아슬아슬한 빙판도 종종 거쳐야 한다. 산에서 내려온 물이 탐방로를 뒤덮은 채 꽝꽝 얼어붙었다. 아이젠을 반드시 챙겨야 하는 이유다. 평지의 빙판에서는 슬쩍 미끄럼도 타보고, 산속 강선마을 주민이 마련해 놓았을 디딤돌이나 흙을 조심조심 밟으며 지났다. 작은 계곡이 얼어버린 듯한 경사진 탐방로 앞에서는 아이젠을 챙겨 신고 한발 한발 힘을 줘 내딛는다. 날이 얼음에 박히는 소리도, 얼음을 단단하게 딛고 선 느낌도 새롭게 안 재미다.

◇ 탁 트인 고원의 칼바람에 가슴이 뻥

네 번째 다리를 건너 곰배령이 600m 남았다는 안내판을 지나면 지금까지보다는 약간 가파른 구간이라 호흡이 살짝 거칠어지지만 그것도 잠깐, 거센 바람이 몰아쳐 고개를 드니 탁 트인 평원이다. 우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작은 점봉산과 점봉산 뒤로 설악산 대청봉까지 보이는 해발 1천164m 고지의 너른 평원에는 키 작은 나무와 풀이 거센 바람에 울고 있었다.

영하의 날씨를 모르는 캘리포니아에서 디자인한 구형 휴대전화는 주머니에서 꺼내 허공에 치켜들자마자 영하 18도의 칼바람을 맞고 까무룩 꺼져버렸다.

너른 평원이라고 함부로 발을 내디뎌서는 안 된다. 돌이나 나무가 깔린 탐방로에 서서 겸허한 마음으로 360도로 몸을 돌려가며 시력이 허락하는 먼 곳까지 눈길을 둔다. 미세먼지에 시달렸던 몸과 마음이 개운해졌다.

전망대 방향으로 가면 생태관리센터로 가는 하산로(5.4㎞)와 귀둔리로 가는 곰배골 탐방로가 있지만, 반드시 입산한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올라온 길보다 가파른 하산로는 눈이 쌓이고 얼음이 어는 겨울에는 위험하기 때문에 탐방이 금지된 상태다. 귀둔리 곰배골에서 곰배령을 오르는 곰배골 탐방로(3.7㎞)는 지난해 5월부터 탐방예약제가 시작됐다. 곰배골 탐방로는 산림청이 아닌 국립공원예약통합시스템(https://reservation.knps.or.kr)에서 예약해야 한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mih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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