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선생 기념관 건립 긴급 지상좌담회]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제100주년을 맞는다. 최근의 남북, 북중, 북미 간 한반도를 둘러싼 평화와 번영을 위한 노력들이 향후 100년을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돌아오지 않은 특사’로 이미 널리 알려진 이상설 선생의 구국의 항일독립운동과 외교활동의 뜻과 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성공기념관 건립이 추진 중에 있다. 이에 공주대학교 이연우 교수의 진행으로 이를 재조명하는 각계 관련 단체장들의 연석회의를 통하여 긴급 지상좌담회를 개최하고 이를 우리의 시대정신으로 삼고자 한다.

◆일제강점기 만주, 연해주 일대 이상설 선생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해….

“권업회, 광복군 양성 주도”

▲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이상설 선생은 주로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셨던 위대한 독립운동가입니다. 선생의 항일독립운동은 십삼도의군과 성명회,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 등으로 대표될 수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헤이그특사 파견 이후인 1909년 연해주 봉밀산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운동기지 건설에 노력하였고, 1910년 6월에는 유인석, 이범윤 선생 등과 함께 러시아 지역 의병 통합을 추진하여 '십삼도의군'을 편성하셨습니다.

또한 1910년 8월, '한일합병'이 현실화되자 곧바로 항일단체인 '성명회'를 조직해 일본정부에는 규탄 성토문을, 각 국 정부에는 '합병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성명회 선언서'를 보내기에 이릅니다. 특히 이 선언서에는 연해주 각지로 망명한 유인석, 이범윤, 정재관, 이남기 등 현지 한인사회의 지도자가 총 망라된 8624명의 서명록을 첨부함으로써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집약적으로 천명했습니다. 이를 이유로 일제는 러시아 당국에 선생을 비롯한 성명회 간부 수십명을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선생은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셨다가 1911년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와 '권업회'를 조직, 광복군 양성 활동을 주도하셨습니다. 특히 1914년에는 권업회 핵심인물인 이동휘, 이동녕 선생 등과 함께 연해주와 북간도지역 독립운동가를 규합해 국외 최초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되었습니다. 이후 1915년 상해에서는 박은식, 신규식 선생 등과 "신한혁명단"을 조직해 정신계몽과 무장투쟁을 통한 동양 평화를 주창하셨습니다.

이렇듯 선생께서는 헤이그특사 파견 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항일투쟁의 전진기지로 삼으셨으며 1917년 3월, 생을 달리하시기 전까지 온몸을 던져 조국 광복을 이룩하고자 하셨습니다.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도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실 정도로 광복을 이루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리셨던 선생의 고귀한 뜻을 존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헤이그 특사'로서 이상설 선생에 대한 평가와 재조명.

▲ 한완상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장
“첫 항일민족학교 설립”

△한완상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장=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올해는 3·1운동이 벌어지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입니다. 보재 이상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어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게 되자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1906년 간도로 가서 민족 최초의 항일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였습니다. 당시 항일의식을 가진 조선인들이 모여드는 간도에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독립운동 기지화의 계기를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는 명동학교와 신흥학교로 이어졌고, 국내외 각 지방마다 한민족의 터전에는 어디든 이와 같은 민족교육이 확대되어 수많은 독립운동의 역군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조선에서 이주해온 자녀의 민족교육과 항일민족정신을 고취시킨 교육자로서 선생의 위상을 높이 평가합니다.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선생은 그해 6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특사로 참석하였습니다. 여기서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국권회복 문제를 세계에 알리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국력의 뒷받침이 없었고,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 협상의 성격을 띤 회의였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선생은 회의에 공식적으로 참석하지는 못하였지만 비공식 경로를 통해 일제의 침략과 한국의 독립요구를 정확히 각국 대표에게 알림으로써 한국문제를 국제정치 문제로 제기시키려는 활동을 폈습니다.

비록 일본의 방해로 특사의 회의 참석은 거부되었으나 구미 언론에서 한국문제를 정당하게 다루게 한 언론활동은 매우 주목되는 일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활동은 7월에 열린 각국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서 돋보였습니다. 이 회합은 만국평화회의의 공식 석상에는 없는 각국 외교문제까지 취급했기 때문에 평화회의의 각국 대표는 물론 이름난 언론인과 각국 수행원 및 기자들까지 참석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위종 특사는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는데, 모든 참석자들이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해 7월 이준 특사가 자결을 단행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본국에서는 일본의 압력으로 궐석재판이 진행되고 선생에게는 종신형이 선고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귀국을 단념하고 구미열강을 차례로 순방하면서 활발한 외교로써 항일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 평화의 관건임을 주장하였고, 나아가 한국의 영세 중립을 역설하기도 하였습니다.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한 외교활동으로 구미 각국 순방외교를 마친 이후 1908년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선생은 미주 각 지역의 한인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1908년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이 대회의 목적은 한국의 독립을 옹호하기 위해 해외 각지의 한인단체들을 규합하여 일치된 행동을 꾀하는 데 있었습니다. 선생은 이 대회를 통해 당시 미주의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의 통합과,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와의 통합까지 확대시켜 당시 최대의 민족운동 단체인 국민회를 탄생시키는 계기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일제 강점기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교육과 언론, 외교활동을 통한 민족의 독립정신을 일깨우신 선생의 애국정신이 계승되길 바랍니다.

◆선생의 항일독립운동정신의 계승 발전을 위한 노력과 의미 부여에 대해….

“임시정부 수립에 큰 역할”

▲ 이시종 충북도지사
△이시종 충북도지사=
일제강점기 선생은 국제관계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국제외교무대에서 홀로 고군분투하셨습니다. 국력이 뒷받침이 되어주지 못한 망명생활의 고단함, 부단한 해외독립운동으로 누적된 과로, 그리고 독립운동 과정에서 겪은 좌절 등으로 건강까지 심하게 해쳐 젊은 나이에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외롭게 순국하셨습니다. 선생의 삶과 죽음은 우리 근현대사와 세계사의 한 단면을 너무도 잘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을 위한 단체나 조직에 선생은 늘 그 중심에 섰습니다. 성명회를 조직하고, 13도의군을 편성했던 선생은 일제의 방해로 러시아 관헌에 체포되기도 하셨지만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고, 신한혁명단과 함께 1919년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가장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이는 대한제국~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대동맥이 되었습니다.

관료보다는 대학자이며 교육자로서의 선생은 이미, 조선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할 때 태어나시어 망국의 전 과정을 하나하나 목도하면서 그것을 막아내고자 몸부림치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 죽음으로 항쟁하셨습니다. 이제, 선생의 뜻과 정신을 계승하고 이를 현창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거듭, 전국적인 국민의 관심과 참여를 기대하며 선생의 사상과 정신을 기리는데 우리 충북도도 함께 하겠습니다.

◆성공기념관 건립을 위한 국민의 참여방법.

▲ 이석형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장
“범국민 성금운동 전개”

△이석형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장=
2015 11월 처음 국회예산결산소위원회에서 기념관 건립예산이 확정, 통과된 이래 민, 관, 기업 간 참여거버넌스 구축은 유관기관, 단체 간 원활한 협력으로 가능해졌습니다. 이는 순국 제100주년 추모식과 각종 행사 등에서 더욱 빛났습니다. 특별히 언론사들의 취재, 인터뷰, 대담 등에서도 전국적인 성원에 힘입은 바 컸습니다. 현재 추진 중에 있는 1인, 1만원, 1구좌 범국민 성금 모금운동과 온라인상의 크라우딩펀딩 조성 및 선생 관련 출판물 등의 판매를 통하여 민간의 참여기회 확대를 더욱 넓히고 있습니다.

올해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건국 제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특히 1907년 헤이그 구국사행으로 쓰러져가는 국가 민족의 운명을 부여잡으려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셨고, 그 후 10여년 풍찬노숙하며 국내외 항일독립운동의 전선을 선도한 선생의 뜻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이야 말로 우리 후대들의 당연한 도리라고 하겠습니다. 사)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는 이를 위한 ‘범국민나라사랑운동’도 병행하여 펼치고 있는바 각계 국민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기대해 마지 않습니다. 선생께서 목숨을 걸고 지키고 이루고자 하셨던 자주적 민주국가를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하겠습니다. 2021년 4월 기념관이 준공되면 전국, 해외동포들까지 참여하는 민족사관학교의 운영도 적극 검토 중에 있으며 수학관, 과학관, 체험학습관 등 교육, 문화시설로서의 ‘이상설선생기념관’은 명실공이 애족·애국교육관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가 기념관 건립의 성공조건입니다.

◆‘이상설선생기념관’ 건립 추진·조성에 대한 자세한 경과는.

“세계 각지 자료 발굴 노력”

▲ 이연우 이상설선생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부위원장
△이연우 이상설선생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부위원장=
선생의 뜻과 정신을 기리고 이를 널리 현창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몫이죠? 최근 대한광복군정부·이상설스토리텔링북 등이 간행되었지만, 전체적인 선생의 항일독립운동과 구국의 외교활동에 대한 일목요연한 정리와 재편집도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그간 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와 사)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는 이의 보완과 중·일·러시아 국가문서보관소에 있는 선생의 자료, 사진 등 조사·발굴 작업에 힘써 왔음도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이와 병행하여 전국, 해외동포들까지 참여하는 성공기념관 건립 범국민 성금운동을 펼쳐왔습니다. 처음 쪽지예산 확보에서 부터 범국민 성금모금운동까지 최근의 펀드 조성과 국전 초대작가들의 작품전시판매전 그리고 평전, 이상설이야기, 잊혀진 독립운동이야기 등 우수도서 출판물의 판매까지 많은 노력을 경주해오고 있습니다만, 우리사회 기부문화에 대한 불신과 사회전반의 경제적인 어려움 등으로 많은 곤란을 겪고 있음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해외동포들까지 참여하는 전국적인 국민의 관심과 성원으로 기념관 건립의 취지와 당위성이 제기되고, 유관기관 및 관련단체들간 협력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으로 올해 3월 그 착공식들 앞두고 있으며, 그간 언론사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이상설다큐멘터리 제작, 전국 방영과 역사토크쇼 개최, 대담, 인터뷰 등 취재와 보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왔음도 높이 평가합니다.

일제강점기 이 땅에 사는 그 자체가 오욕의 역사였을 때, 선생의 숭고한 항일독립운동정신은 조국광복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이 정신과 우리시대 선진화의 원동력도 바로, 선생의 시대정신에서 기인했음은 우리 역사가 잘 말해줍니다. 민족의 횃불로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선생의 역정을 다시 반추해 보며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내우외환의 위기를 더욱 슬기롭게 잘 헤쳐 나가야 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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