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승혜 대전시립미술관장

평온함에 안주하고 싶다. 눈을 뜨고 갑천을 바라보면,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황홀감마저 든다. 주섬주섬 운동복을 입고 동이 트기 전에 달리기를 시작한다. 엑스포공원을 지나 엑스포다리를 서면 우아하게 흐르는 강물에 비친 새벽빛은 숨이 멎을 듯 평화롭다. 마음은 감사함으로 충만하다.

평온함이 계속될까? 13세기 고려말 귀족들은 평온한 삶이 나약함으로 전이되는 것을 극복하기 어려웠다. 조선말 대다수의 양반들은 평온한 농촌풍경이 곧 산업혁명의 여파로 새로운 경제질서와 대중사회로 이전하는 극적인 변화가 도래할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개인의 평온함은 감사의 감사를 거듭할 만한 축복이지만 과연 유토피아와 같은 평온함을 후대에 물려줄 수 있을지, 혹은 나의 안이함이 빠른 변화 속에서 후퇴가 되어버릴지, 가까운 미래를 상상해 보면 긴장감에 등골을 오싹하다.

평온함은 무엇인가? 세상의 평온함이 지속되리라 낙관할 때, 궁벽함으로 새로운 세상을 찾아나선 사람들이 있었다. 평온함으로 살아온 이들에게 이해할 수도 없는, 이해하기도 어려운 행동이다.

임기제의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 2~3년마다 힘들게 마주서는 질문이 있다. 구비구비 당면하는 고비마다 어려운 숙제를 하나씩 풀어가야 한다.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힘들다. 나도 평온함에 숨고 싶다. 숲 속의 작은 은신처에서 나오고 싶지 않은 수많은 유혹의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오늘도 이렇게 평온함에서 나와 새로운 과제를 풀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조금 더 나은 세상을 후대에 물려주고 싶다는 생존본능이다. 우리 삶도 임기가 있는 과정이다. 언제인가는 임무를 다하고 마감을 해야 한다. 임무가 주어지는 시기에 적극적으로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점을 찾는 용기, 그보다 더 큰 도전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나는 이 과제를 함께 풀어갈 시대의 예술가를 만나고 싶다.

예술가들은 평온한 영혼일까? 불안한 영혼일까? 예술가들은 섬세한 감성으로 현실을 증폭해 감지한다. 예술가는 삶 자체가 증강현실이다.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주파수가 들리는 듯, 미묘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예술가들에게 소소한 행복도 극락의 정점이며, 작은 괴로움도 극단적 불안감으로 증폭된다. 예술가들이 불안정함을 표현해 내는 능력은 가까운 미래의 예지자로서 역할을 한다. 마치 자연재해가 나기 전에 미리 안다는 동물의 본능과 같은 경고의 기재다. 예술가들이 평온함을 깨어버리는 듯한 표현은 새로운 세계로 가는 지렛대다.

어떻게 평온함을 극복할까? 예술의 공감력으로 지금 여기를 직시해 본다.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기쁨을 기쁨으로 느끼며, 분노를 분노로 느끼며, 슬픔을 슬프게 느끼며, 즐거움을 즐겁게 느끼는 함께 느끼는 공감력이다. 실은 이렇게 평범한 공감의 감정처리가 쉽지 않다. 공감으로 나와 네가 연결하는 용기와 노력이 필요하다. 마치 감정은 나만의 것이라서 전달도 공유하기도 힘든 것 같지만, 공감은 울림과 같아서 하나의 시공간은 에네르기로 공유되고 있다.

왜 평온함을 극복할까?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 바라는 간절함으로 평온함에서 벗어나본다. 평온함에서 벗어나니, 삶의 반경을 무한히 확대된다. 삶의 굴곡은 당연지사라서 실패 속에 성공의 예감이 있고, 성공 속에 실패의 대비를 한다. 평온함의 극복은 함께 하는 더 큰 평온함을 선사한다.

평온함에서 벗어나려니, 도연명의 ‘도화원기’가 뇌리를 스친다. 어느 봄날 한 어부가 강을 따라 올라가서 복사꽃이 핀 무릉도원에 도착했다. 남녀노소 평온한 일상을 이루고 외부와 떨어져서 사는 동네다. 하지만 어부는 이곳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만약 나에게 무릉도원에 남을 것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것이다. 나는 희로애락이 있는 현실의 삶으로 가서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희로애락의 공감에서 미래가 움트기 때문이라고 빙긋이 미소로 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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