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12 大田의 탄생
1898년 부설권 일본에…, 반일감정… 노선 고민 커
日, 고심끝 현 노선 결정, 인부들 비협조… 순검 파견
러일전쟁 발발 후 속도전, 1905년 1월 1일 첫 출발
대전역 원래 이름은 태전, 이토 히로부미 변경 지시

▲ 일본의 경부선 노선 결정 기준은 시간을 절약하고 주민저항도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오늘 대전의 탄생을 가져온 계기가 됐다. 사진은 1922년 일본 '조선의 사정'(朝鮮の事情) 수록 대전역 사진. 대전시 제공
구한말 서울~부산, 경부선 철도 부설권을 차지하려는 열강들의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1898년 4월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 총리가 직접 서울에 왔다. 자칫 러시아에 부설권이 넘어갈 판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가 한반도를 지배할 수 있고 그것은 일본에도 위협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결국, 일본의 압력에 굴복한 우리 정부는 경부선 부설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한·일의정서'를 그해 8월 8일 체결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경부선 철도는 3개 안으로 집약되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 철도사’에 의하면 제1안이 서울~충주~안동~경주~울산~부산이었고, 제2안은 서울~충주~청주~문경~대구~밀양~부산이었다. 그러나 1안과 2안으로 할 경우 너무 동부에 치우쳐 러시아나 프랑스가 서부 쪽에 제2 경부선을 놓겠다고 나설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제3안으로 서울~청주~공주~논산~금산~영동~대구~부산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이 정한 원칙 즉 ①유사시 용병이 용이할 것 ②경제적 효용 가치 ③물의가 발생할 지역회피 등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이 역시 채택되지 않았다. 공주나 청주처럼 반일감정이 높은 전통세력이 강한 곳을 피하자는 것이다. 사실 공주의 유림들은 신성한 계룡산을 뚫어 철마가 불을 품고 달리는 것은 절대 천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반대했지만 밑으로는 반일감정이 깊게 깔려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중요한 변수가 된 것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는데 경부선 철도완공의 시급성이 제기된 것이다. 그래서 시간을 절약하고 주민저항도 피할 수 있는 노선을 책정하다 보니 충주, 청주, 공주, 논산을 빼버리고 서울, 천안, 대전, 영동, 대구의 노선이 최종 결정됐다. 이것이 오늘 대전의 탄생을 가져온 운명이요 계기가 된 것.

▲ 일본의 경부선 노선 결정 기준은 시간을 절약하고 주민저항도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오늘 대전의 탄생을 가져온 계기가 됐다. 사진은 6·25전쟁 당시 대전역 모습. 육군 제공
일본은 이때부터 공사를 서둘렀다. 허허벌판이던 지금의 대전역 자리에 철도건설사무소가 생겼고, 철도부지로 수용된 토지의 보상도 급하게 추진됐다. 논의 경우 평당 40전에서 17전, 밭은 16전에서 8전으로 강제 집행을 하는 바람에 토지주들의 반발이 컸지만 '힘없는 나라'의 백성은 도리없이 땅을 빼앗기다시피 내놓아야 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 철도사'에 의하면 일본이 공사하면서 힘들어한 것은 한국이 인부들의 점심을 사용자 측에서 제공하는 관습과 여름 장마철이 긴 것, 그리고 주민들의 반일감정이었다. 이 때문에 공사장에는 일본 순검(순경)이 2명씩 파견되었다. 정말 그때의 시대 상황을 짐작게 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공사를 서둘렀는데도 대전~옥천 간의 터널이 많아 러시아와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 완공을 못 본채 1904년 2월 6일 전쟁은 터지고 말았다. 그래서 공사는 더 급해져 전쟁 중에도 강행됐고 마침내 1905년 1월 1일, 역사적인 경부선 철도가 개통돼 비로소 대전역도 세워졌다. 역무원 4명, 경비 순검(경찰) 2명, 도합 6명이 전 직원이었으니 초라한 간이역 정도였다. 지금 직원이 300명 정도 되는 것을 생각하면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철도건설 기술자 등, 대전역 근처에는 일본인 188명이 모여 살기 시작했고 이것이 점차 일본인을 끌어들여 일본인 타운을 형성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다. '조선 철도사'에 의하면 처음 대전역 이름은 '태전(太田)'이라고 했는데 얼마 후 이토 히로부미가 대전(大田)으로 바꾸라고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