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형 을지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새벽 4시경이었다. 막내 아이 울음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올리고 아이 곁으로 다가갔다. 아이가 다시 잠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몸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한 20분쯤 지났을까. 아이는 다시 새근새근 숨을 쉬며 잠들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잠이 다시 들었다고 확신했기에 아이를 살며시 내려놓은 후 내 잠자리를 찾아 뒤돌아서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나의 다리를 잡는 것이 아닌가. 잠시 그러려니 싶어 잠깐 서 있었다. 아이의 손에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낀 후 바로 다리를 빼보려고 했다. 그런데 아이는 손이 아니라 이번엔 팔로 나의 다리를 감싸 안았고 느껴지는 힘은 처음보다 더 강했다. 보채거나 울거나 하지도 않았다. 오전에 출근을 해서 오늘도 아픈 아이들을 열심히 돌보려면 조금이라도 더 자고 피로를 풀어야 하는데…. 이런 나의 생각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다리를 빼보려고 약간의 힘을 주면 반사적으로 아이의 팔이 더 강하게 나의 다리를 감싸 안았다.

어떻게든 상황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생후 6개월 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팔을 난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냥 우두커니 선채로 다시 잠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아이의 팔 힘이 참 강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그 순간 문득 나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생각에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빠랑 함께 하고 싶은 아이의 간절함이 내 마음을 파고든 것이다. 꿈보다 해몽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나의 직감은 다른 이유를 따져 볼 수 있도록 허락지 않았다. 순간 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나의 욕구를 향하지 않고 아이의 마음을 어느 덧 향하고 있었다. 나를 향한 아이의 마음이 고마웠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움직이면 아이가 깰까봐 그냥 그대로 서 있기로 했다. 빨리 안자고 버티던 얄미운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둠 속에 어렴풋이 보이는 아이의 모습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이대로 잠을 청하면 그 아이의 고마운 마음이 사라질까 싶어 나는 잠자리에 눕기를 포기했다. 얼마 되지 않아 아이는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나를 놓아 주었다.

그날 출근길, 나의 머릿속은 '간절함'이란 단어로 꽉 차 있었다. 난 최근 무엇을 간절히 바라며 살고 있었나, 간절히 붙잡고 매달릴만한 대상이 지금 나에게는 있는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희미하게 맴돌 뿐 어느 것 하나 분명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어느 덧 현재 삶의 편리함에 익숙해져 있는 나 자신만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어릴 때 탁구를 아주 좋아해서 나만의 탁구채를 갖는 것이 소원이었던 적이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용돈을 한푼 두푼 모아서 겨우 싸구려 탁구채를 손에 쥐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흘렀던 기억이 난다. 얼마 가지도 않아 탁구채가 부러지는 바람에 버려야 했던 아픔도 함께 말이다. 더운 여름엔 백곰 아이스크림이 너무 먹고 싶어 10원을 벌기위해 부엌 설거지도 마다하지 않았던 기억도 생생하다.

지금 시대에는 먹을 것, 입을 옷을 비롯하여 아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꺼리들이 주변에 아주 많다. 그러다보니 이것 사고 나면 조금 지나 저것 사달라고 난리다. 조금 갖고 놀다 흥미가 떨어지니 다른 것 사달라고 떼를 쓰기 일쑤다. 시리즈로 나오는 장난감을 침이 마르도록 사달라고 했던 나의 첫째 아이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배고프면 3분만 참으면 된다. 먹음직스런 음식이 눈앞에 뚝딱 나타나니까. 간절히 바라지 않아도 원하는 것을 손에 쥐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것 같다.

간절함은 기다림을 동반했던 것 같다. 기다리다 보면 간절함은 더욱 그 깊이를 더해 갔고 그러다보니 성취감도, 가진 것에 대한 소중함도 한층 더 크게 다가왔던 것 같다. 간절함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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