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수 공주대학교 교수

2019년 새해가 밝았다. 요즘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을 다시 꺼내 읽고 있다. 작금의 나라꼴이 1592년의 조일(朝日)전쟁 발발 전후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왜국이 1580년 말에 강국(强國)이 될 수 있었던 것은 1543년 다네고지마(種子島)에서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확보한 조총과 화약제조법 때문이다. 특히 화약제조법은 명나라와 조선이 쉬쉬하던 1급 군사기밀이었다.

왜국은 화약 주원료인 초석을 구입하기 위해 유황과의 물물교환을 제의했다. 하지만 초석 주산지였던 중국은 은(銀)과의 교환만을 요구했다. 당시 왜국은 은광이 많았지만 고순도 은(銀)을 추출할 수 있는 정제기술이 없었다. 결국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밀정을 보내 조선의 '회취법'을 탈취해갔다. 왜국은 그것을 토대로 은을 대량생산한 후, 중국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초석을 구입했다.

1582년 6월 2일, 왜국의 전국통일과정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本能寺)에서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암살당하자 그의 가신(家臣)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아케치를 죽인 후 정권을 장악했다. 조총과 화약, 전국통일과정에서 단련된 무력(武力)이 조일전쟁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도요토미는 무엇보다 명나라의 조공무역에 불만이 컸다. 조선과는 매년 조공무역을 허락하면서도 왜국은 10년에 한 번씩만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도요토미로 하여금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부르짖게 만든 속사정이었다.

반면, 조선선비란 자들은 왜국의 이런 사정엔 눈을 감은 채, 동서(東西)로 파당을 지어 싸움질만 했다. 왜국에 통신사로 다녀와서도 엇갈린 주장으로 백성들을 기만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공맹(孔孟)의 도리만 외치던 그들은 입을 다문 채, 쪽팔린 도주를 선택했다. 그것이 조선 지식인들의 민낯이었다. 1592년 조일전쟁은 유성룡과 이순신의 전쟁이었다. 유성룡은 육지에서 군량미 조달에 헌신하며 명(明)의 심유경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간의 강화협상을 저지시키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마침내 그들의 거짓강화협상은 국서변조사건으로 파국을 맞으면서 제2차 조일전쟁(정유재란)으로 이어졌다. 바다에서는 이순신의 전쟁이 7년 내내 이어졌다. 그의 분전으로 식량의 보고(寶庫)인 전라도가 온전하게 지켜졌고 조선은 끝까지 붕괴되지 않았다.

한편 조일전쟁이 끝나자마자 선조는 토사구팽을 단행했다. 작미법과 면천법 시행, 중강개시, 훈련도감 설치, 속오군 편성으로 백성들의 대동단결을 이끌어내며 7년 전쟁을 총지휘했던 유성룡을 내친 것이다. 종전일인 1598년 11월 19일은 조선을 지탱했던 두 개의 별이 역사에서 동시에 사라진 날이다. 그날 아침 유성룡은 영의정에서 파직되었고 남해바다 노량에선 이순신이 전사했다. 이제 우리는 주변을 냉철하게 둘러봐야 한다. 선조와 같은 국론분열의 정치인, 심유경과 같은 위선적 대북협상가, 무장(武將) 이순신을 능욕한 조선관료들과 같은 인간들이 없는지? 있다면 그들부터 정치무대에서 신속하게 끌어내려야 한다. 그것이 구국(救國)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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