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10 고려 太祖 왕건, 天安에 깃발을 꽂다
후백제 목천서 강력 저항…왕건, 고려 건국 후 천안도독부 설치
왕건, 장인인 제궁을 도독부사로…서경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겨
전락·통치차원 뛰어넘어 천안의 ‘풍수지리학적 의미’에도 주목

▲ 2016년 천안 동남구 목천읍 동리 전원주택 텃밭에서 발견된 '왕건추정' 청동상. 천안시 제공

[충청투데이] 왕건은 처음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신하였다. 그러다 궁예가 자칭 '미륵'행세를 하면서 패도를 일삼자 그를 뒤엎고 고려의 기치를 들었던 것. 따라서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보다도 후발주자였으며 곳곳에서 저항에 부딪혀 고전하기도 했다. 지금의 천안 동북부는 아직도 궁예의 세력권에 있었고 남쪽으로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세력이 기세를 높이고 있었다.

특히 지금의 천안시 목천지방 저항이 극열했고 왕건은 여기에서 오랜 시간 곤욕을 치렀다. 고려사 연구의 권위자로 알려진 윤용혁 공주대 명예교수는 “목천지방의 저항이 얼마나 강했으면 왕건이 이곳을 정벌하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저항의 주도자들에게 기존의 성씨(姓氏)를 짐승의 이름으로 바꿨다고 '동국여지승람'이 기록했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윤 교수는 “서기930년 8월 고려 태조 왕건이 '천안도독부'를 설치하고 도독부사로 자신의 장인이기도 한 제궁을 임명한 것을 보면 이와 같은 목천의 저항이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천안에 도독부를 설치한 것은 천안이 신라의 옛 땅과 특히 기세가 높아가는 견훤의 후백제를 공략하는 전략적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었을 것이다.

▲ 천흥사 동종. 동종 명문에 '성거산(聖居山) 천흥사'라 적혀 있음. 성거산은 태조 왕건이 천안을 방문하다가 성거산이 오색구름에 싸여있는 것을 보고 "저 산에는 성인이 사는 모양이다"라고 말하고 산 이름을 성거산이라고 지었다고 함. 후일 후삼국을 통일한 후 천안에 천흥사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안시 제공

지금의 광역지방단체격인 도독부는 행정은 물론 군사지휘권까지 갖고 있는 데다 정권의 실세이며 장인이기도 한 제궁을 도독부사로 앉힌 것을 보면 왕건은 천안을 서경(西京·지금의 평양)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관할 구역도 목천은 물론 직산과 지금 아산의 탕정까지 포함한 광활한 면적이었으며 이때 비로소 우리 역사상 '天安'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고 태조산을 비롯 이 지역에 고려와 관련된 지명과 사찰이 많이 생겨났다.

어떻게 보면 이와 같은 도독부 설치는 왕건이 만든 최초의 신도시를 천안에 건설한 것이다. 요즘 우리 정부가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 가까이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과 비슷하지만 고려 태조 왕건이 천안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주택문제가 아니라 후삼국 통일과업을 달성하려는 전략과 통치차원에서 마련한 것이다.

그러면 왕건이 이 지역을 고려의 제2수도라 할 수 있는 도독부를 설치한 데는 또 다른 이유는 없을까? 고려사를 비롯한 여러 기록에는 왕건이 천안이 갖는 풍수지리학적 의미에 주목했다는 것이다. 즉 천안을 장악하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다든지, 천안이 평안하면 나라가 평안하다 또는 나라가 평안하려면 천안이 평안해야한다는 등등….

이와 같은 태조 왕건의 천안에 대한 평가는 당시 그에게 도움을 주었던 스님들과 술사에게서 영향 받은 바 크다. "천안은 삼국의 중심에 있고 오룡이 구슬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형상이니 이곳에 고려의 깃발을 꽂으면 후백제는 망한다"는 요지로 술사 예방이 진언했다는 기록 등이 그것을 증명한다 하겠다.

실제로 왕건은 당시 스님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대표적 인물로 희랑대사가 있다. 그는 통일신라 말기 이름 높은 스님이었으며 왕건의 스승으로 알려질 정도로 왕건의 고려 개국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 희랑대사가 있던 경남 해인사는 경제력과 함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해인사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왕건으로서는 남부지방 진출이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천안에 도독부를 설치하며 모든 전략적 기반을 갖춘 왕건은 서기 936년 9월, 보병 2만 3000명, 마군(馬軍) 4만 명, 기병 9800명, 원병 1만 4700명 등 도합 8만 7500명의 대군을 이끌고 후백제와의 결전을 치르기 위해 진격의 나팔을 울렸다.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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