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9 大田에서의 마지막 피난 國會
한강철교 폭파전 정부 요인 대전行, 1950년 7월 1일 ‘임시 국회’ 소집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국회 불만↑, 행정부 뒤숭숭… 부통령은 결국 사임
역사의 소용돌이… 그 중심엔 충청이

▲ 6·25전쟁으로 한강 철교가 끊기기 전 정부 요인들은 대전으로 집결했다. 사진은 1950년 7월 1일 임시 국회가 소집됐던 옛 충남도청의 현재 모습. 충남도 제공
6·25 전쟁으로 한강 철교가 끊기기전 정부 요인들은 서둘러 대부분 대전으로 집결했다

이시영 부통령은 6월 29일 뒤늦게 대전에 도착하여 동아연필 창업자이며 우송대학과 대전상고의 설립자이고 독립운동가였던 김노원 선생집에 짐을 풀었다 지금은 없어진 대전시 동구 성남동에 있던 '성남장'에는 주요장관들이 방을 차지했고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던 이범석 장군은 같은 정치적 동기였던 주기영씨의 인동 집에 입주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 1950년 7월 1일 충남도청 회의실에서 임시 국회가 소집되었다.

우리 국회가 발행한 '國會史'에 의하면 이날 출석한 국회의원은 재적 191명 중 84명. 신익희 국회의장은 단상으로 올라가 출석 보고를 받고 과반 미달로 회의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간담회' 방식으로 회의를 진행하겠다고 선언한다.

이승만 대통령, 이시형 부통령을 비롯, 행정부에서는 신성모 국방, 백성욱 내무, 임병직 외무, 이우익 법무, 김석관 교통, 장기영 체신 등 11명의 장관들이 참석했고 특별히 무초 주한 미대사도 이례적으로 초청되었다.

그러나 서울을 황급히 떠나 왔기 때문에 국회속기사가 불참한 가운데 개회가 선언됐다. 충남 출신 국회의원으로는 김종회(대덕), 이금종(연기), 김명동(공주을), 박충식(논산갑), 이상철(청양) 의원 등이 참석했다

▲ 6·25전쟁으로 한강 철교가 끊기기 전 정부 요인들은 대전으로 집결했다. 사진은 1950년 7월 1일 임시 국회가 소집됐던 옛 충남도청 1980년대 전경. 충남도 제공
이상철 의원이 발언을 신청했다. 그는 대통령이 국회에 통고도 없이 서울을 떠난것과 특히, 예고없이 한강철교를 폭파하여 62명의 국회의원과 서울 시민들이 남으로 내려 보지 못한 것을 따졌다. 의석 여기 저기서 정부를 성토하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와 같은 소란한 회의장을 가라 앉진 것은 무초 대사의 말이었다. 그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이 속속 부산항에 상륙하고 있으며 맥아더 장군이 한국 수호에 확고한 결의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하자 흥분한 회의장은 진정됐고 이승만 대통령도 안도의 얼굴빛을 보였다.

이날 국회간담회에서는 국회 내에 정부와 전시문제를 다룰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의했다. 위원으로는 서민호, 김종회, 지청천, 황수성, 김용우 이용제 의원을 선출 했다. 가까스로 국회분위기를 진정 시켰지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불만은 계속되었다. 심지어 신익희 국회의장과 조봉암 부의장 등은 충남도지사 관사를 임시 경무대로 사용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상황은 불안했다.

행정부에서도 이시형 부통령이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다. 물론 부통령인 자신까지도 속이고 서울을 떠난 것이 가장 큰 요인 이었다. 결국 이시영 부통령은 부산 피난정부시절 '거창 양민학살' 사건을 문제 삼아 1951년 '국민에게 고함' 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직을 사임해 버렸다.

지금은 고인이 된 충남 청양출신이며 민주당 장면총리 때 내무장관까지 역임했던 이상철 옹은 생전에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충남도청 복도를 힘없이 걸어가던 모습이 눈에 선해요, 옆에 있는 무초대사에게 즉각적이고 대대적인 미군 지원을 간절하게 호소하는 거였죠."

정말 그 시절, 우리는 격동의 역사 소용돌이 중심에 있었다.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 6·25전쟁으로 한강 철교가 끊기기 전 정부 요인들은 대전으로 집결했다. 사진은 1950년 7월 1일 임시 국회가 소집됐던 옛 충남도청 1980년대 전경. 충남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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