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녕… 을사조약 후 매국노 응징 결사대 조직
임시정부 수립 주역… 광복군 창설 추진중 순국

[충청투데이 조선교 기자] “우리의 용기가 좌절하였는가? 아니다. 우리의 정열이 식었는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유일한 요구인 독립에 대한 결심은 더욱 견고할 뿐입니다…적의 간담이 서늘하도록 천지가 울리는 만세를 합창합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정에서 산파 역할을 한 이동녕 선생<사진>이 학생들에게 발포한 포고문의 일부다. 이 선생은 1869년 충남 천안시 목천면에서 태어나 충북 청원군에 거주하고 있던 조부 이석구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후 1892년 강원도 원산(당시 함경남도)에서 부친과 광성학교를 세워 계몽운동을 펼치는 등 육영사업에 힘썼다.

명문가 출신인 이 선생은 진사시험에도 합격한 선비였지만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을 경험하면서 유학사상에 머물지 않고 근대적 민족의식을 새롭게 형성해나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1896년부터 독립협회 간사원으로 활약하며 근대민권운동과 국권수호운동을 전개했고 봉건정부의 실정을 규탄하면서 외국으로 넘어가는 각종 이권의 양여를 반대하는 데 앞장섰다. 또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결사대를 조직해 매국노에 대한 응징을 계획했고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경술국치 이후엔 신흥무관학교 등의 설립을 주도했고 연해주 일대에서 대한광복군정부 결성에 참여해 국내·외 독립운동 기반 구축에 힘썼다.

이후 이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건너가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으로서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이 됐고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통령 대리, 주석 등을 역임하며 임정을 유지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안타깝게도 이 선생은 일흔을 넘긴 뒤 광복군 창설을 위해 노심초사하던 중 지병인 천식과 급성폐렴증세로 1940년 광복을 목전에 둔 채 순국했다. 그는 유언으로 “민족의 대동단결만이 광복을 단축시킬 수 있다”며 임정을 유지하기 위해 흩어졌던 3당을 통합할 것을 당부했다. 조선교 기자 mission@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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