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송병선… 외세에 대한 사상적 무장 앞장
전국 돌며 제자 양성… 을사조약 후 상소투쟁

[충청투데이 나운규 기자] “오늘에 이르러 나라가 망하게 되고 백성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일제가 만일 기필코 제멋대로 무례하게 군다면 300개의 고을 안에 어찌 얼굴에 피 칠을 하고 닥치는 난을 막을 사람이 없겠습니까.”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사진) 선생이 올린 ‘을사조약 파기 상소문’에 있는 문구다. 1836년 8월 24일 대전 회덕(懷德·대덕구) 출생인 송 선생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9대손으로, 큰아버지인 송달수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그는 조선시대의 엄격한 신분제 사회가 점차 붕괴되고 근대로 넘어가는 격변의 시대에 태어나 봉건 질서의 붕괴와 외세의 침략을 직접 보면서 기울어져 가는 국가를 되살리기 위한 성리학자로서의 고민과 갈등, 행동양상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강조하는 성리학의 의리사상을 기반으로 서세동점(西勢東漸)과 일제침략의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또 의리사상에 입각해 저술된 선조들의 문집을 편찬·보급하고, 새로운 유교적 정치윤리사상인 위정척사사상을 정립해 전파함으로써 외세에 대한 사상적 무장에 적극 힘썼다. 그는 전국 각지를 순례하며 동지들을 찾아 교유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장차 국권회복운동의 인적 기반을 쌓아갔다. 특히 19세기 후반 개항(開港) 이후 20여 차례의 상소를 통해 무분별한 개화정책을 비판하면서 내수 정비와 군사력 배양의 부국강병책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 선생은 조약 파기와 을사 5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 투쟁을 벌이면서 국왕 면담을 요청하다가 일제에 의해 지방으로 강제 귀가 조치됐다. 이에 그는 자결·순국으로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해 강력한 저항의지를 표출하면서 민족의 국권회복의지에 불을 지폈다. 대전지방보훈청은 지난 7월 연재 송병선 선생을 우리지역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나운규 기자 sendme@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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