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봉 충북NGO센터장

23면.jpg
30년 전 대학에 들어와 처음 읽은 책이 전태일 열사의 삶을 다룬 전태일 평전이었다. 열악한 노동현실 속에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를 온 몸에 불을 붙여 호소했던 희생에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며 평화시장 길바닥에 쓰러진 전태일 열사의 외침은 많은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삶의 나침반이 되었다. 1970년 분신하기 2개월 전 전태일 열사는 대통령에게 보낸 진정서에서 1일 14시간 강제된 작업시간을 10시간에서 12시간으로 단축하고,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한다고 요구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로 말이다.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했다. 공장은 조명이나 환기 장치가 충분하지 않았고 위생이나 안전이 무시됐다. 작업 중에 일어나는 사고는 노동자 본인의 부주의로 간주되고, 상해를 입은 노동자는 당장 쫓겨나기 일쑤였다.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 장시간 노동, 생계유지가 어려울 정도의 저임금 등에 시달려야 했다" 이 내용은 놀랍게도 1830년에 영국 의회에서 조사한 미성년 아동 노동에 관한 보고서 내용 중 일부이다. 산업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로 변화된 세상에서 자본가들의 탐욕스런 이익 추구가 야차(夜叉)와 같이 사나운 시절이었다. 190여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노동자의 현실은 더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얼마 전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가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공기업에 입사를 준비하던 중 경험을 쌓기 위해 들어간 발전소가 그의 마지막 일터가 되었다. 혼자 4곳의 석탄운송설비를 담당한 그는 지상 70m 높이를 좁은 계단으로 오르내려야 했고, 야간근무 때는 12시간 동안 3차례씩 자신이 맡은 구간을 오가며 일해야 했다. 작업장은 컨베이어와 롤러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시커먼 석탄가루가 날려 코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숙련자도 하기 힘든 위험한 작업을 입사 3개월밖에 안 된 그가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그가 남긴 것은 고장 난 손전등, 탄가루가 묻은 수첩, 그리고 컵라면 세 개와 과자 한 봉지가 전부였다. 노동계에서는 그의 죽음이 위험한 일을 하청업체에 맡기는 외주화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 원래 정규직은 2인1조로 일을 하는 시스템이었지만 외주화가 되면서 비용절감을 이유로 그에게는 이러한 안전수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조사에 의하면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생긴 발전소 안전사고 중 97%가 하청 노동자가 다치거나 사망했다고 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죽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꽃다운 아들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는 성탄절에 뉴스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이게 원청에서 그렇게 일을 시켰고, 나라에서 구조적으로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그러니까 법을 개정해서 다시 만들어 한사람, 한사람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그 사람도 인간 대우, 대접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탄절입니다. 하늘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내려 오셨잖아요. 그것처럼 정부에서도 우리 어둡게 이렇게 일하는 사람 한사람, 한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하셔서 그 사람들 다 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48년전 아들을 떠나보낸 노동자의 어머니,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어머니는 생전 인터뷰에서 "소외당한 노동자, 빈민에서 울고 있는, 부르짖는 서민들, 그런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 줬으면, 내 평생 소원이 그거"라고 말씀하셨다. 두 어머니의 인터뷰가 오버랩되는 성탄절이었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