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 역사유람] 7 가야산 大院君 부친묘 도굴사건
대원군, 가야사 태우고 예산군 덕산면으로 남연군 묘 이장
그의 아들 명복 훗날 고종… 손자는 순종으로 왕위에 올라
獨 오페르트 도굴 시도 실패… 쇄국정책 강화·천주교 박해

▲ 독일 상인 오페르트에 의해 파헤쳐졌던 예산군 덕산면 남연군(대원군 부친) 묘 전경. 이곳은 두 명의 왕이 나온다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예산군청 제공
대원군 이하응은 왕손이면서도 세도를 누리고 있던 안동 김씨의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건달처럼 이리 저리 떠다니며 위장 생황을 했다 때로는 안동 김씨 세도가의 잔치집을 찾아가 허리를 굽혀 술 한잔 얻어 마시며 취한척 비틀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정적들로 하여금 이하응의 존재를 방심하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집권에 대한 강한 집념을 불태웠다.

우선 장차 왕이 될 아들을 얻기 위해 당시 내노라하는 풍수 가들을 찾아 다니며 왕을 나을 묘자리를 선택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선택된 곳이 지금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28번지. 바로 이곳이 두명의 왕이 나올 명당이라는 것. 그러나 이곳에는 하필 가야사라는 조그만 절이 있는 것 아닌가.

대원군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떤 장애물도 그의 짐념을 꺽지 못했다. 절을 태워버리는 것이다. 일설에는 다른 곳에 절을 지어 주기로 하고 태웠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경기도 연천에 있는 그의 부친 이구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을 서둘렀다. 1846년, 당시 교통이 발달되지 않아 행여로 연천에서 가야산 묘터까지 30일이나 걸렸다.

그런데 그로부터 7년후 대원군은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고종 임금이며 명복이라 했다. 명복이 열두살 되던해 철종 임금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오랫 동안 준비하고 있던 대원군의 재빠른 작전으로 아들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왕이 어려 아버지인 대원군이 수렴청정,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손자, 그러니까 고종의 아들인 순종도 비록 조선의 마지막 왕이지만 왕위에 올랐으니 가야산 동쪽 구릉에 묘를 쓰면 두 명의 왕이 배출된다는 예언은 맞은 것이 아닐까?

그런데 왕을 배출했다하여 보물처럼 여기던 남연군 묘에 사단이 발생했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이 묘를 도굴한 것이다 그것도 서슬이 퍼런 대원군이 한창 권세를 떨칠 때 일어났다. 오페르트는 우리 정부에 두 번이나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이와 같은 범행을 저질렀는데 젠킨스라는 미국인으로부터 도굴 비용을 지원받고 대원군에 의해 박해받던 천주교도 몇을 동원했다. 그는 조상의 묘를 매우 신성시하는 한국인의 관습을 알고 이를 무기로 통상을 하려 했다는 추측도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태가 올 것을 예상했던지 남연군의 묘는 삽질을 시작했지만 단단한 석회로 내부를 단단히 꼼짝할 수가 없었다. 여러 시간 곡괭이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해 바다에 배를 대기시켜 놓고 도굴 작업을 벌였는데 썰물 시간이 가까워 오자 모든걸 포기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은 도중에 수포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 후유증은 매우 컸다. 이 사건을 보고 받은 대원군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것만 같았다. '남의 조상 묘까지 파헤치는 것들과는 어떻게 상대를 하랴!'

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더욱 강화됐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도 마찬가지 였다. 이렇게 독일 상인 오페르트에 의한 남연군 묘 도굴사건은 저물어 가는 조선왕조의 또 하나 황당한 해프닝을 던진 것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이곳에는 1960년대 불탄 제각의 흔적이 있고 남연군 이장때 사용한 행여가 보존돼 있다. 그리고 가야산 동쪽 고즈넉한 구릉에 서면 대원군 이하응의 권력을 향한 뜨겁던 집념이 겨울 바람결에 느껴지는 것 같다.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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