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수 공주대학교 교수

광해군 15년(1623년 3월 12일)에 능양군 이종(李倧·인조)이 김류, 이귀, 신경진, 김자점, 이괄, 최명길 등 서인(西人)들과 반란을 일으켰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의 폐모살제와 명나라에 대한 불충(不忠)이었다. 폐모살제는 인목왕후를 서궁에 유폐하고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것을 말한다. 하지만 백성들의 호응은 별로였다. 반정 4일만에 광해군의 폐모조치에 반대하다 여주로 귀양 갔던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추대한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원익은 광해군을 보필하며 대동법 실시, 명·청간 중립외교, 양전(量田·토지조사)사업을 추진함으로써 백성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았던 인물이다.

반정세력들은 적폐청산위원회인 재성청(裁省廳)을 신설해서 사회개혁을 시도했지만 경륜 부족과 무능력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개혁 피로감에 염증을 느낀 백성들은 상시가(傷時歌)로 그들의 위선과 내로남불을 가차 없이 조롱했다. ‘인조실록(1625년 6월 19일)’에 등장하는 상시가의 내용은 이렇다. ‘아 훈신들이여/스스로 뽐내지 마라/그들의 집에 살고/그들의 토지를 차지하고/그들의 말(馬)을 타며/그들의 일을 행하니/너희들과 그들이/다른 게 무엇인가!’

인조는 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평안병사 이괄의 난(1624년 1월 17일)으로 한양을 떠나 공주까지 도주해야 했다. 공주 공산성의 영은사와 정안면의 석송정이 그의 피난과 관련된 유적이다. 또 반정주역들이 충주 탄금대 전투(1592년 4월 28일)에서 패전하고 자살한 장수(將帥)들의 아들이라는 것도 특기할만하다. 거의대장(擧義隊長) 김류는 김여물의 아들이었고, 반정에 쿠데타군을 제공한 신경진은 신립의 맏아들였다.

반정세력의 무능이 극에 달한 것은 중국 중원의 패권향방을 무시하고 숭명반청(崇明反淸)을 고집한데 있다. 여진족 누르하치는 광해군 8년(1616년) 금나라를 세웠고 그의 8번째 아들은 인조 14년(1636년)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황제라 칭했다. 그가 청 태종이다. 명나라 잔존세력을 쳐부수고 청 제국 건설에 앞장섰던 그는 배후세력인 조선의 반청정책에 불만을 품고 1627년 3만의 군사로 조선을 침략해서 형제지맹(兄弟之盟)을 맺고 물러갔다. 일명 정묘호란으로 불리는 제1차 조청전쟁이다. 그런데도 조선의 반청정책이 계속되자 그는 1636년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재침략했다. 병자호란으로 알려진 제2차 조청전쟁이다. 그의 응징은 이전보다 가혹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그에게 항복의 예(禮)로 남색 옷을 입고 삼배구고두례를 해야만 했다. 그는 군신지맹(君臣之盟)을 확약 받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비롯한 수많은 인질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환향녀의 비극도 그때 탄생했다.

한편 그에게 수모를 당한 인조는 중원의 국제정치에 눈뜬 맏아들 소현세자와 며느리 강씨, 손자(석철·석린)를 죽였다. 강상의 윤리마저 거스른 그의 야만과 추악함은 조선 멸망의 단초로 작용했다. 인조의 실패는 친북 및 친중정책에 따른 한미동맹의 와해와 저주에 가까운 적폐몰이에 몰두하는 불량세력들에게 경고음을 보내고 있다. 지금 당신들은 그 소리를 듣고 있는가!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